문화·스포츠 문화

“블랙리스트, 단순 지원배제 사건 아닌 반헌법적 국가범죄”

“문화예술위, 예술인자치 기구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긴급 토론회 잇따라



“블랙리스트 사태는 청와대가 기획하고 국가정보원이 관여하고 관련 부처와 기관이 조직적으로 실행한 국가적 범죄입니다. 단순히 문화예술 지원배제 사건이 아닌 헌법에 위배되는 범죄행위로 재규정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블랙리스트 1심 판결을 다시 묻다-조윤선은 과연 무죄인가’를 주제로 열린 긴급토론회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1심 판결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문화예술계 차원의 대응과제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날 첫 발제자로 나선 하주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변호사는 “58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이번 판결은 헌법적 가치가 결여돼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며 “특히 ‘법비’라고 불리는 김기춘이 공직생활 중 훈장을 받은 점을 참작하거나, 지난 정권의 요직을 거치며 권한을 행사해온 조윤선이 마치 ‘블랙리스트’ 해결 의지를 보였던 것처럼 언급한 점 등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극작가 겸 연출가인 이양구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 공동대표는 이번 재판을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법정”이라고 규정했다. 정작 블랙리스트 사태의 피해 당사자인 현장 예술가들이 법정에서 진술 기회를 얻기는커녕 철저하게 배제됐고 이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 등 관련 기관 공무원들이 피해자로 둔갑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블랙리스트를 집행하며 권력에 봉사했던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진술을 하면서 대중마저 자기의사결정의 자유를 제한받은 힘 없는 공무원처럼 여기고 있다”며 “블랙리스트 가담자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예술인들은 그들에게 지금도 지원 서류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날 토론회는 자연스럽게 1심 판결 이후의 과제를 논의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우선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를 단순한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사건이 아닌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의 훼손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데 참가자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블랙리스트 첫 내부고발자로 알려진 이미도 연극평론가는 ”이번 판결문을 보면 김기춘, 조윤선 등이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보고 받았는지 여부를 따지면서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를 단순한 지원 배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청와대가 기획하고 국가정보원이 총체적으로 관여하고 관련기관이 조직적으로 실행했던 국가적 범죄로 재규정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씨는 또 “조윤선의 무죄 판결도 황당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실행자였던 권영빈·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 이사장들이 기소 없이 논란을 비껴가고 있다는 점”이라며 “이들의 권한 남용 사실을 낱낱이 밝혀 법적으로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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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단죄 못지 않게 문화예술계가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블랙리스트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구조적 개혁이다. 같은 이유로 문화예술인들은 현재 막바지에 접어든 문예위 위원장 공모 과정에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문예위는 지난달 10일 신임 위원장 공모를 공고하고 현재 임원추천위원회의 면접심사(7일)와 최종 추천만을 남겨둔 상태지만 이 과정에서 문예위 구조 개혁과 조직 정비에 대한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것이 문화예술인들이 우려하는 문제다.

지난 3일 서울 서교동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블랙리스트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게 묻는다’ 토론회는 문예위 재정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 참가자들은 “문화예술인들에게 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설명이나 양해 없이 졸속으로 문예위원장 공모 절차를 밟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발제자로 나선 권혁빈 예술인소셜유니온 운영위원은 “지금과 같이 폐쇄적인 인력풀 안에서 원로 예술인들만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하는 한 블랙리스트는 재발할 수 있다”며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예술인 수를 대폭 확대하고 최소한 소위원회의 문호를 활짝 열어 청년, 여성 예술인이 다양하게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금의 문예위는 마치 주민센터에서 복지급여를 신청하듯 문화예술인들이 돈을 타 쓰는 지원행정기관처럼 둔갑했다”며 “예술인행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문화정책기획자로 활동했던 김종선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운영위원장도 이날 토론자로 나서 문화예술자치기구에서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전락한 문예위의 위상 문제를 꼬집었다. 김 위원장은 “문예위든 콘진원이든 공석이된 문화예술체육 기관의 수장을 하루 빨리 임명하는 것은 오히려 맞다”고 전제하면서도 “정부 역시 기관장 임명에 앞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해당 기관을 개혁할지 보여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자율성을 가진 독립기구였던 문화예술위원회가 박근혜 정부 시절 공공기관으로 둔갑하며 관료 중심 지원 기관이 된 것은 위원장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공공기관 지원에 관한 법률 등 법 개정, 구조 개혁, 예산 자율성 확보 등을 통해 문예위가 본래의 기능과 구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편 이날 토론회를 주최한 공연예술인노동조합, 뮤지션유니온, 예술인소셜유니온, 청년예술가네트워크는 이날 토론 결과를 담은 의견서를 문체부에 제출하기로 했다.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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