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바이오

[토요워치]붉게 타오르는 신약개발 열정

1g의 가능성에 도전

'21세기 불로초'를 찾아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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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불가능을 만든다, 신약 개발 잔혹사


“신약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개발하는 거예요.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지만 끝까지 앉아서 연구하다 보면 실마리가 보입니다. 내가 만든 약이 사람을 살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신약 개발이 주는 극한의 성취감은 마약 중독과도 비슷하죠.”

박용욱 SK케미칼 바이오3팀 수석연구원은 오늘도 흰 가운을 입고 세포배양실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전날 배양에 실패했기에 오늘은 다른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 1%의 확률도 되지 않지만 1g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도전해야 한다. 세포주를 분리하고 다시 조합하기를 여러 차례, 결국 이번에도 원점이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새로운 세포 배양기술을 고민한다. 내가 찾아내지 못한 방법을 누군가는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얼마 전에는 경쟁사가 새 신약 후보 물질을 찾아냈다는 소문까지 들었기에 마음은 더욱 타 들어간다. 도전과 실패, 다시 도전을 반복하는 일상이지만 목표가 분명하기에 오늘도 현미경을 잡는다.

박 연구원의 별명은 ‘미스터 독감’이다. 그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세포 배양 방식의 4가 독감 백신 ‘스카이셀 플루’를 개발한 주역이다. 독감 백신 개발에 뛰어든 지 6년 만에 거둔 결실이었다. 세포 배양 방식은 기존 유정란 방식보다 변종 독감 바이러스에 대응이 쉽고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 차세대 백신 기술의 총아로 불린다. 박 연구원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SK그룹이 우수 임직원에게 수여하는 ‘수펙스(SUPEX) 추구상’에서 ‘혁신상’을 받았다.

박 연구원은 “신약 개발은 모든 것을 최초로 판단하고 증명해야 하기에 실패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마음먹은 대로 연구가 되지 않을 때는 약사의 길을 선택한 친구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약 개발이 주는 고통과 쾌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자 확률과의 싸움이다. 여기에 시간과 비용이라는 함수가 더해진다. 후보 물질 탐색에서 신약 출시에 이르는 확률은 0.02%다. 5,000개 회사가 신약 개발에 뛰어들어 1개 회사만 성공한다는 의미다. 임상시험 중에도 수많은 변수가 신약 개발을 가로막는다.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임상시험 환자를 모집해야 하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임상시험이 중단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우여곡절 끝에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경쟁사가 비슷한 효능의 저가 제품을 내놓는 바람에 상용화에 실패하는 사례도 있다.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갖춘 다국적 제약사가 글로벌 신약 시장을 주도하는 이유다.

국산 신약이 본격적인 도약기에 접어든 것은 1999년부터다. SK케미칼이 국산 1호 신약 ‘선플라’를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이달 초 국산 29호 신약으로 허가받은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까지 지금껏 20개 회사가 29종의 국산 신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산 신약의 글로벌 경쟁력은 초라한 수준이다. 매년 수출액이 꾸준히 증가하고는 있지만 지난해 생산 실적이 있는 국산 신약 20종의 평균 매출액은 104억8,400만에 그쳤다. 단일 신약으로 수 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제약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수년째 2,000억원대에 매출이 머물러 있는 동화약품보다 1년 먼저 스위스에서 창업한 로슈의 지난해 매출은 무려 60조원에 달한다.

치열한 성장통을 겪었던 국산 신약은 최근 들어 글로벌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 2015년 한미약품이 글로벌 제약사와 신약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주요 제약사들의 신약 개발에 가속도가 붙었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세계 최초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을 잇따라 선보였고 메디톡스, 신라젠, 바이로메드, 툴젠 등 벤처기업도 국산 신약의 미래를 이끌 기대주로 꼽힌다.

☞ 신약, 머리와 끈기로 탄생

시간·비용·두뇌와의 처절한 투쟁

국산 신약, 글로벌 무대서 잇단 성과


●상상 그 이상…고가 신약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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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고의 시간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신약은 가격도 상상을 초월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의약품관리종합정보센터에 따르면 국내에서만 회당 치료비가 1,000만원이 넘는 치료제가 2개나 된다.

5mg에 1,120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 ‘레모둘린’와 12mg에 1,037만원인 ‘렘트라다’는 각각 폐동맥고혈압 환자와 다발성 경화증 환자의 증상 개선과 치료에 쓰인다. 국내 바이오벤처 안트로젠이 크론병을 겨냥해 개발한 줄기세포 치료제 ‘큐피스템’은 회당 최대 1,349만원까지 청구가 가능해 국내에서 가장 비싼 의약품으로 꼽혀 왔지만 실제로 청구된 가격은 회당 759만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고가 의약품 대다수는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여서 실제 판매량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목숨과도 같이 소중하다. 약값 기준 상위 10개 의약품 가운데 국내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발작성야간혈색뇨증(PNH) 치료제 ‘솔라리스’ 다. 솔라리스는 적혈구가 파괴돼 혈뇨 현상을 일으키는 PNH의 유일한 치료제로 꼽히는데 1회 주사 가격이 평균 613만원으로 지난해 총 5,505건, 337억원 어치가 판매됐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환자가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비급여 치료제는 판매량이 상대적으로 더 적다. 환자 수가 적은 데다 보험까지 적용되지 않아 환자들이 선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비급여 의약품 중에는 희귀 유전병의 일종인 파브리병 치료제 ‘레프라갈’만 상위 2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파브리병은 세포 속 리소좀에 있는 가수분해 효소의 활성이 부족해 생기며 심한 통증과 혈관각화종 등의 피부질환, 각막 혼탁과 신장 이상 등의 증상을 보이는 난치병이다. 상위 20위권 고가 신약 중에는 파브리병 치료제가 3개나 된다. 1병당 가격은 사노피 ‘젠자임파브라자임’이 471만원으로 가장 비쌌고 이수앱지스 ‘파바갈’이 399만원, 샤이어 ‘레프라갈’이 233만원의 순이었다.

박용욱 SK케미칼 바이오3팀 수석연구원이 독감 백신에 쓰이는 세포를 배양하기 위해 진단용 시약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SK케미칼박용욱 SK케미칼 바이오3팀 수석연구원이 독감 백신에 쓰이는 세포를 배양하기 위해 진단용 시약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SK케미칼


☞ 치료제 회당 1,000만원?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가 대다수

큐피스템 1,349만원 가장 비싸

비아그라 등 우연한 효능 대박도

●실수가 만든 ‘신의 한수’

개발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효능이 신약의 운명을 바꿔놓은 경우도 많다.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가 대표적 사례다. 초기 화이자의 개발 목표는 고혈압 치료제였다. 임상시험을 마치고 출시를 앞둔 상황에서 기존 치료제에 비해 낮은 상업성으로 고민했다. 연구팀은 임상시험에 참여한 환자에게 남은 약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여성 환자만 약을 가져왔을 뿐, 남성 환자 상당수가 약을 반납하지 않았다. 비아그라에 발기부전을 치료하는 부작용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 계기다.

전립성 비대증 치료제 ‘프로스카’는 주성분의 함량을 5분의 1로 줄인 탈모 치료제 ‘프로페시아’로 변신해 대박을 터트렸다. 프로스카가 경쟁 제품보다 전립성 비대증에는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발모는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면서 프로페시아로 새롭게 탄생했다. 프로페시아는 지난해 전 세계 시장 1위 탈모 치료제로 자리 잡을 만큼 인기가 많다.

항응고제 ‘와파린’은 처음에 쥐약으로 개발됐다. 쥐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미 해군 병사가 뇌출혈도 없이 멀쩡하게 퇴원하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연구가 시작됐다. 이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심근경색 발작 후 와파린을 항응고요법으로 투여한 게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탔다.

문송천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한국인의 급한 성격과 세밀한 손재주로 만든 자동차와 휴대폰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처럼 한국인 특유의 집념과 끈기는 신약 개발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며 “한국을 대표하는 신약이 나오려면 기업이 마음껏 신약을 연구할 수 있도록 정부가 규제를 풀고 생태계 구축을 지원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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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성·김경미·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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