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 판문점에서 남북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회담이 열렸다. 당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긴장이 높았던 터에 북측 박영수 단장의 극언이 터져 나왔다. 박 단장은 협상이 꼬이자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며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는 폭탄발언을 터뜨렸다. 북측에서 나온 최초의 ‘불바다’ 발언이었다. 북한의 퉁명스러운 사투리까지 더해져 공포감에 휩싸인 국민들은 라면 등 먹을거리를 사재기하느라 한바탕 소동을 치러야 했다.
북한은 위기상황마다 극언과 협박을 일삼으며 전쟁 열기를 고조시키는 수법을 사용해왔다. 북한 주민들의 동요를 막는 한편 전쟁공포 극대화에 따른 남측의 국론분열과 갈등을 겨냥한 일종의 심리전이다. 우리가 대북 심리전 방송을 위한 확성기를 설치하면 “서울의 불바다까지 내다본 무자비한 군사적 타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적진을 아예 벌초해버리라”거나 “멸적의 불도가니에 쓸어 넣으라”는 호전적 발언도 우리로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을 정도다.
적대국 간 말폭탄 공방은 한반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옛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은 “미국을 묻어버리겠다”거나 “우리는 소시지처럼 쉽게 미사일을 만들고 있다”는 등의 공격적 발언을 쏟아내 미국을 자극했다. 이런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하고 북한과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단정하는 발언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입에서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할 것”이라며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에 앞서 “폐허의 비(a rain of ruin)를 맞을 것”이라고 한 경고를 연상시킨다. 평양에서는 이에 맞서 “미국에 핵불벼락을!” “섬멸적 보복타격”을 부르짖으며 군중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국은 평온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주식 매수기회로 인식하는 투자자들이 많다며 놀랍다는 외신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이 개는 무서울수록 더 크게 짖는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상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