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경제난, YH 사건…유신 독재의 종식

경제난, YH 사건…유신 독재의 종식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서울 마포. 경찰 병력 1,200여 명이 마포 신민당사로 짓이겨 들어갔다. 목표는 신민당사 4층 강당에서 농성 중인 가발업체 YH무역 여공 173명의 해산. 여공들이 40여 시간 전에 야당 당사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두 가지. 억울함을 호소하고 신변을 보호받기 위해서다. 아무리 유신정권이라도 야당 당사에 공권력을 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신민당 당직자들은 기습적으로 찾아온 여공들을 당혹해했으나 김영삼 총재(당시 52세)는 ‘여러분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이 여러분을 보호하겠습니다’라며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YH 무역은 한때 수출 순위 15위에 오를 정도로 잘 나가던 기업. 1966년 설립돼 초고속성장 가도를 달렸다. 수출 진흥책과 중공 핵실험의 반사 이익 덕분이다. 당시 미국 가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는 이탈리아. 중공산 머리카락을 재료로 가발을 제조해 미국시장의 90%를 점유했으나 갑자기 몰락하고 말았다. 중공의 1964년 10월 핵실험 탓이다. 핵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이 중공산 원료를 쓰는 제품 수입을 금지하자 이탈리아 가발 산업은 바로 주저앉았다.

뉴욕의 한국 무역관 장용호 부관장은 이를 기회로 여기고 왕십리에 공원 10명 규모의 작은 가발 공장을 차렸다. 사명은 이름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YH 무역이라고 지었다. YH 무역은 무주공산인 미국 시장 수출 급증 덕에 폭발적으로 커 나갔다. 설립 4년 만인 1970년에는 공장 규모 노동자 4,000여 명으로 증가하고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장 사장은 이때 대우 김우중 사장과 같은 상을 수훈했지만 급성장세는 곧 그쳤다. 경쟁이 격화하며 성장세가 확연히 꺾일 무렵부터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던 사주 일가는 회사 자산을 미국에서 외상 수입하고 갚지 않는 방식으로 빼돌렸다.

자연스레 노동조합이 설립되자 회사 측은 직원 수를 계속 줄였다. 사주가 앉힌 대리인은 무리한 사업 확장에 실패한 끝에 임금도 밀렸다. 결국 YH 무역은 1979년 3월 말 ‘4월 말에 폐업한다’는 공고문을 붙였다. 당시 중소기업의 폐업은 흔한 일이었다. 1978년부터 불경기에 들어선 경제가 1979년 초 이란 회교혁명으로 촉발된 제2차 석유파동을 맞아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부도율이 사상 최고에 달하고 대기업들은 중화학공업 과다 투자로 몸살을 앓고 있던 터. 폐업이 일상사처럼 발생했지만 YH 무역의 경우는 좀 달랐다. 노동자들은 빼낸 회사 돈으로 미국 사업을 크게 벌린 사주 일가의 위장 폐업이라고 생각했다.

위장 폐업 철회와 회사 운영 정상화,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며 투쟁해온 노동자들은 노동청의 중재가 무위로 끝나고 회사 측이 기숙사의 물과 전기 공급을 끊자 8월 9일 농성장을 옮겼다. 마포 신민당사로. 김영삼 총재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정부 부처에 고용 승계와 전직. 회사 정상화 등 대안을 타진했으나 어느 부처도 듣지 않았다. 고위 공직자들의 외면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김 총재가 ‘선명 야당’의 기치를 걸고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던 시기여서 해결책을 모색했다가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날 수 있었을 테니까.

박 정권은 사태 수습보다 신민당부터 비난하고 나섰다. 여당인 공화당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들의 교섭단체인 유정회(유신정우회)는 ‘김 총재와 야당이 노사 갈등을 조장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청와대는 대화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10일 오전 핵심 참모들과 대책 회의에서 강력하게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여당과 청와대 ‘관계자’들은 ‘여공들을 부추기는 불순한 세력이 있다’며 안보 차원에서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권의 이런 생각을 대부분 언론은 그대로 받아쓰고 사설에도 올렸다.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 이틀 밤을 맞는 10일 밤 10시 40분께 여공들은 긴급 총회를 열었다. 경찰이 강제 해산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여공들은 ‘경찰이 우리를 강제로 해산하겠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죽음으로 맞서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투신조’와 ‘할복조’를 정한 여공들의 일부는 울거나 비명을 지르며 창틀에 매달려 ‘물러나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쳤다. 감정이 복받친 일부는 정신을 잃어 병원에 실려 나가는 초긴장 상태에서 김영삼 총재가 나섰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이름을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다’는 김 총재의 말에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여공들은 다소 안도했으나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의 회고(관훈저널 2008년 7월호 ‘언론 생활 45년’). “그 전날 밤부터 날씨는 무척 더웠다. 마포 네거리에 있는 신민당사는 더욱 뜨거웠다. 저임금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며 진입한 YH사 여공 180여 명이 4층 강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고, 당직자 사무실이 있는 2~3층은 기자들과 당원들로 북적거렸다. …(중략)… 새벽 1시 50분께 누군가 ‘경찰이 쳐들어온다’고 방마다 두드리며 외쳤다. 정전이 됐는지(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이 마포 일대의 불을 껐다) 깜깜한 주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0분 후 ‘쳐들어 온다’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창밖을 내려다보니 이게 무슨 중세시대의 성(城) 공략전인가. 긴 사다리로 경찰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었다. 4층에서는 여공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여기서 모두 죽자’ ‘모두 모여라’ ‘조별로 모이자’ ‘엄마 나 죽어’하며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신민당 당직자들과 의원들은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2층 총재실로 모였다. 문에 책상을 쌓아두고 벽 쪽에 김영상 총재, 다음에 국회의원, 다음에 출입 기자들, 그리고 외곽에 당직자와 당원들이 겹겹이 앉았다. 총재를 보호하는 인의 장막을 친 셈이지만 소용없었다. 경찰은 총재실 벽을 부수고 김 총재를 먼저 끌어냈다. 다시 이 전 논설위원의 회고. “가만히 보니 흰 장갑을 낀 사복 경찰들 손에 길고 검은 호스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들은 기자들에게 모두 두 손을 머리 뒤로 하고 고개를 숙인 후 입 다물고 얌전히 내려갈 것, 움직이면 무조건 제재를 가한다고 경고했다. …(중략)…내려가는 동안 무수한 발길과 주먹이 날라왔다. 그런데 필자 앞의 노재성 기자(TBC 정치부)가 고개를 드는 순간 긴 고무호스가 날라왔고, 노 기자의 머리가 갈라지면서 피가 앞은 물론 필자의 셔츠와 얼굴까지 튀었다. 그의 머리를 감싸자 필자 등에도 퍽 소리를 내면서 호스가 날라왔다. 과거 전방에서 기합 때 맞은 쇠파이프보다 (골이 흔들릴 정도로) 몇 배 더 아팠다.”


사진기자들은 경찰에게 필름을 뺏기거나 땅바닥에 짓밟혔다. 당직자들은 더 많이 당했다. 현역 의원이며 신민당 대변인인 박권흠 의원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맞았다. 김영삼 총재는 사복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그래도 이는 약과였다. 여공들 가운데 사망자가 나왔다. 불과 23분에 끝난 진압 작전이 끝난 후 노동자 김경숙이 1층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새벽 2시 30분 숨졌다. 김경숙 씨 사망과 관련된 경찰의 발표는 세 번 바뀌었다. ‘애초에 투신했는데 경찰이 받아서 살려냈지만 결국 죽었다’가 처음 발표, 두 번째는 ‘동맥 절단 후 투신자살을 기도,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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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발표한 것이 ‘건물 북쪽 창가에 있다가 밖이 소란해지자 스스로 자해 투신했다’는 설명이었으나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신민당 사인규명위원회의 ‘경찰 진입 이후 사망’ 주장도 극히 일부만 신문 지상에 알렸다. 김경숙의 사망 원인은 29년 세월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2008년 과거사 규명을 위한 진실화해위원회는 부검 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근거로 ‘손목에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었고, 곤봉과 같은 물체로 가격 당한 상처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사망 시각도 신민당 조사위의 주장과 같이 경찰 진입 이후로 밝혀졌다.

꽃다운 22세 나이에 경찰의 폭압에 죽어간 김경숙은 혼자 죽지 않았다. 시인 고은의 시 ‘YH 김경숙’의 마지막 소절.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가봐라’처럼, 폭력을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 유신 체제도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YH 사건 이후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정부 여당은 ‘배후 세력 색출’을 강조했지만 신민당은 ‘8.11 폭거는 말기적 발악이다. 국민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플래카드를 당사에 걸었다. 소속 의원들은 농성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미국의 태도. 8월 14일 미국 국무부는 ‘한국 경찰의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 사용을 개탄하며 적절한 문책을 바란다’는 이례적인 대변인 논평을 냈다. 한국 정부가 바로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자 미 국무부는 한 발 더 나갔다. ‘미국은 과거 소련이 유대인을 괴롭힐 때도 비슷한 논평을 낸 적이 있다. 내정간섭이 아니다.’ 국내에서 내정 간섭 논란은 ‘사대주의 논란’으로 번졌다. 뉴욕타임스 9월 16일에 실린 인터뷰에서 김 총재는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소수 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라”며 “미국이 점점 더 국민으로부터 소외된 독재 정권이냐, 아니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다수냐를 분명하게 선택할 시점이 왔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 미국에 의존하는 반민족적, 사대주의 발언으로 국가원수를 모독했으며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게 이유였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10월 4일 날치기로 의원직 제명안을 통과시켰다. 김 총재는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미국은 김 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를 본국으로 불렀다. 최근에는 지미 카터 대통령이 10월 13일 자로 박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까지 공개됐다.

친서에서 카터는 “저는 김영삼 씨의 의원직 제명과 당직 취소(총재직 직무정지)로 결말이 난 최근 몇 주의 상황을 깊게 우려합니다. 정치적 비판에 대한 구속과 제재의 기조가 계속된다면 당신(박 대통령)이 이뤄낸 발전의 대부분이 위협받을 것입니다.…(중략)… 이 글을 당신에게 쓰는 목적은 솔직히 협박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자유화 기조를 가장 빠른 기회에 재개하는 수단을 찾기를 촉구합니다”고 썼다. 협박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상의 협박에 다름 없었다. 박 대통령에게는 내부의 소용돌이가 또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15일, 유신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를 벌인 적이 없어 ‘유신 대학’이라는 비아냥을 받던 부산대학생들이 움직였다. 시민들도 가세했다. 부산을 가까스로 진압하니 불이 마산과 창원으로 번졌다. 학생과 시민들은 ‘유신 종식’과 ‘독재 타도’를 외쳤다. 유신 선포 7년을 지나는 시점에서 맞이하는 최대 위기를 박 대통령은 넘지 못했다. 운명의 10월 26일, 부마 항쟁에 대한 처리를 놓고 경호실장 차지철과 대립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유신의 심장을 쐈다. 고은 시인의 시대로 김경숙의 무덤 뒤로 박정희의 무덤이 생겼다. 유신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신의 종식과 부마 항쟁의 원인을 경제적 요인에서 찾는 시각이 늘어나는 분위기다. 이장규 GIMCO 회장(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의 저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전두환 시대 경제 비사’에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의 회고가 나온다.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모셔왔으나 그처럼 경제에 대해 초조해하고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같은 책에 소개되는 김기환 전 상공부 차관의 부마 항쟁에 대한 평가. “부마사태는 가용 자원을 중화학공업에 쓸어 넣는 바람에 노동 집약적인 중소기업이 많이 몰려 있는 부산, 마산 같은 데서 그런 일이 터진 것이지요. 겉으로는 민주화를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잘못된 경제정책에 대한 저항이 깔려 있었던 셈입니다.”

분명히 1978년부터는 조짐이 나빴다. 경기는 후퇴하고 부동산 가격은 60%까지 뛰는 이상 현상도 나타났다. 정부는 1979년 4월 긴축을 골자로 하는 경제안정화대책을 발표하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의 평가는 직설적이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박정희 모형은 이미 박정희 시대에 실패했고, 박정희는 경제를 망쳐놓고 죽었다. 아니 경제를 망친 결과로 죽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정리하자면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 신호탄 격이었던 YH 사건은 정치과 경제, 사회적 불만이 복합 작용한 전환점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해 YH 여공들을 강제 해산한 직후 TBC는 김성진 정부 대변인 겸 문화공보부 장관의 부름을 받았다. TBC 뉴스에 경찰의 진압 장면을 두 차례 보도했다는 사실에 꼬투리가 잡혔다. 뉴스를 시청한 박 대통령은 김 장관을 불러 이렇게 질책했다고 한다.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신문, 방송을 허가해줬더니 YH 사건이 뭐라고 뉴스 시간마다 내나? 방송 문 닫으라고 해, 신문도 그만두라고 해.”

대통령의 질타를 받은 김 장관은 홍진기 TBC 회장을 불러 30분간 면담하며 ‘삼성을 그만 두겠소? 방송을 그만 두겠소?’라고 윽박질렀다. 국장급에서 차장급까지 YH 사건 방송을 내보낸 보도국 간부들은 즉각 보직이 바뀌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지난 2016년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JTBC는 이적단체’라며 흥분했다는 게 이 부회장의 증언이다.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을 해임하라는 압력도 넣었단다. 부녀(父女)의 권력이 보다 이성적이었다면 불행을 비켜갈 수도 있었을 텐데…. 37년의 시차가 무색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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