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세운 부산의 장수기업 고려제강이 한일건설 인수에 성공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려제강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건축, 자동차, 전기·전자 등 주요 산업의 필수재인 선재와 와이어 분야에서 국내 1위를 선점해온 중견 기업이다. 1945년 설립한 창업주인 홍종열 명예회장은 1918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100세를 맞았다. 여전히 그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홍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기업사의 한 획을 그었다. 선재를 기반으로 한 우물을 파며 연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우직함으로 유명하다. 다만 70년 이상의 역사 속에 2세 체제로 넘어가며 잡음도 나온다. 형제 기업 간 거래로 인한 일감 몰아주기 의혹이 일고 있다.
◇M&A 업계 깜짝 놀란 한일건설 인수=고려제강이 인수합병(M&A) 강자인 삼라마이더스(SM)그룹을 제치고 한일건설을 인수하며 M&A 업계는 깜짝 놀랐다. 고려제강은 한일건설이 아파트 등의 건설과 교량 등 토목 분야에서 두루 강점을 지니고 있고 수주 물량도 상당하다는 점에 관심을 가졌다. 수의 계약을 통해 170억원대의 낮은 가격으로 우선매수권을 확보한 뒤 별도의 공개 입찰에서 선정된 SM그룹이 제시한 272억원을 내며 최종 인수자로 선정됐다. 회생법원이 도입한 매각 방식인 스토킹 호스(수의계약자를 선정한 후 별도의 경쟁입찰을 벌이되 수의계약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주는 방식)로 치른 매각 가운데 수의계약자가 인수한 첫 사례다. 업계에서는 고려제강이 한일건설 인수 이후 건설 관련 사업을 확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관계사들과의 협력관계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제강에서 전자제품 유통까지=홍 명예회장이 1945년 9월 고려상사로 와이어 수입상을 시작해 몇 년 안 돼 고려제강소를 세워 포스코보다 먼저 선재를 만들었다. 1958년 주식회사로 전환했고 1976년 기업공개를 통해 상장했다. 1989년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해외 공장을 세우며 늘렸고 외환위기 광풍이 거셌던 1997년에는 광안대교와 서해대교 등의 와이어 납품 수주에 성공하면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72년의 역사만큼 고려제강은 탄탄한 재무구조와 확실한 관계사들을 가지고 있다. 3월 말 기준 유동자산이 9,093억원에 이를 정도로 실탄을 보유하고 있다. 홍영철 회장 개인의 부동산 투자도 화제다. 2011년 서울 삼성동 옛 대한해운 본사 빌딩을 개인 명의로 사들였다. 현재 시가 약 600억원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빌딩은 현재는 딸 희연씨에게 증여한 상태다. 창업주의 장남인 홍호정 회장은 고려특수선재(고려상사)를 맡고 있고 고려제강은 차남인 홍영철 회장이 맡고 있다. 3남 홍민철 회장은 고려용접봉을, 4남 홍봉철 회장이 에스와이에스리테일(구 전자랜드)을 경영한다.
연세대 농구감독을 지낸 최희암씨가 현재 고려용접봉 사장으로 재직 중인 것도 전자랜드가 관계사로 있으며 인연이 됐다. 2009년 전자랜드 감독에서 물러난 최 감독은 고려용접봉 중국 다롄법인장을 맡기도 했다. STX 다롄조선소 파산 이후 협력업체 대표 등으로 활동하며 보여준 역량에 홍민철 회장은 최 감독에게 고려용접봉 국내영업총괄 사장을 맡겼다.
◇경직된 기업문화 고민=고려제강은 부산에서 알아주는 기업으로 입사하면 속칭 평생 직장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러나 젊은 직원을 중심으로 업무 방식이나 사내 문화, 급여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산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손으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 잦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야근이 발생하는 등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다른 철강회사와 마찬가지로 고려제강은 위험한 일을 다루는 기업의 특성이 딱딱한 군대식 문화도 남아 있다. 사내에서 거수경례를 하거나 임원이 순시하기 전 대대적인 준비를 시키는 등의 관행이 그것이다. 신입 직원이나 중견 직원이나 큰 차이가 없는 급여체계도 내부에서 불만이 많다. 또한 고려제강은 철강 관련 업종을 중심으로 계열사를 넓혀왔는데 기업 간 내부 거래로 국세청이 일감 몰아주기 관련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