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이 기본적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리스크를 테이킹(taking) 하면서 새 가능성에 도전해보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난 11일 서울경제신문이 만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가 역동성(dynamics)을 살리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일감 몰아주기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김 위원장의 철학도 이 같은 진단에서 나왔다. 일감 몰아주기가 재벌의 편법승계 수단으로 악용될 뿐 아니라 중소기업이 클 수 있는 기업생태계마저 황폐화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재벌 3·4세가 (리스크 테이킹하는) 이런 마음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지난 20년간 대한민국 재벌의 ‘반칙’을 누구보다 앞장서 ‘저격’해온 김 위원장. 하지만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의 끝단에 세운 것은 재벌이 아닌 서민이었다. 그는 “2012년 온 사회에 불어닥친 경제민주화의 열풍으로 진보진영이 경제민주화는 우리 거니까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일반시민에게 (재벌개혁이) 내 생활과 무슨 관계냐고 하는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재벌개혁에 초점이 맞춰진 경제민주화로는 대중을 설득하는 어렵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며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이 재벌개혁이라면 본령은 중소기업·비정규직·영세자영업자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취임 두 달을 숨 가쁘게 달려온 김 위원장에게 재벌개혁을 포함한 향후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화 청사진에 대해 물었다. /대담=이철균 경제부장 fusioncj@sedaily.com
김 위원장이 일감 몰아주기를 재벌개혁의 중심에 놓은 이유는 간명했다. 일감 몰아주기가 편법 경영승계의 한 수단이라는 것. 그는 “과거 고도 성장기에는 (대기업이) 이미 선진국에서 성공한 비즈니스모델을 가져와 그걸 밀어붙이는 패스트팔로어 방식으로 성장했다”며 “그러나 어느 순간 모방해야 할 모델이 없어지고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경제환경이 악화되니까 경영을 승계한 3·4세가 리스크를 부담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꼬집었다. 공익재단이나 물타기 증자를 이용한 방법이 제1세대 재벌승계의 수단이었다면 전환사채(CB) 등 회사채를 이용하던 2세대를 지나 3세대에는 계열사에 그룹 일감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경영승계 수단이 진화했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설명이다.
문제는 부작용이 편법승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경제의 성장판을 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대기업이 리스크를 부담하지 않으려고 해 그룹의 성장판이 닫혔고 안전한 일감 몰아주기로 돈을 벌려고 하기 때문에 중소기업 등 경제·사회적 약자에게 큰 피해를 주는 악순환이 최근 10여년간 심각하게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김 위원장이 다른 재벌개혁 이슈와 달리 취임하자마자 일감 몰아주기 직권조사에 나선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공정위는 최근 하림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혐의를 포착해 직권조사를 진행했다. 김 위원장은 “몇 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림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총수 일가가) 사익을 편취하면서 동시에 기업생태계를 황폐하게 하는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서만큼은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공정위는 김 위원장 취임 이후 삼성·현대·SK·LG 등 4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 문제를 해소를 위해 ‘지속 가능한’ 개혁방법을 찾고 있다. 김 위원장은 “4대 또는 5대 그룹 중심으로 더 포커싱된 대상에 현행법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대안으로 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의무공개매수제도란 특정기업의 지분을 공개 매수할 때 50% 이상 사도록 하는 제도다. 김 위원장은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출자총액을 제한하는 둔탁한 방식인 반면 의무공개매수제도는 다른 회사를 인수하려면 출자를 더 많이 하라는 글로벌스탠더드 제도”라며 “우리는 외환위기 직후에 미국식으로 바꿨는데 언젠가는 (의무공개매수제도 같은) 영국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법보다 간접적 수단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기업 지배구조 문제는) 공정거래법보다 상법과 상법·스튜어드십코드·금융그룹통합감독체계 등 다른 부처와의 협력으로 시장 압력이 강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고 했다. 그는 이어 “금융위가 올해 중 금융그룹통합감독체계 법과 시행령안을 낼 예정인데 그 안이 만들어지면 그것에 맞춰 공정거래법도 상호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금산분리 문제에 접근하겠다”고 말했다.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세법 차원에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공정거래법의 의무보유 지분율을 20%(비상장 40%)에서 30%(비상장 50%)로 높이는 것보다는 세법을 가지고 (지분을) 많이 가질수록 세제혜택 더 주는 게 원래 제도의 취지에 맞게 바꿔나가는 방식”이라며 “예산부수법안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정부 내 공감대만 확보되면 의외로 빨리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또 ‘갑을(甲乙)’ 문제에 대한 인식을 ‘병정(丙丁)’ 범위까지 확산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에는 정부가 소수 대기업에 몰아줘도 그에 따른 성장의 과실이 빠르게 확산됐는데 그게 갑·을·병·정까지 이어지는 고리들이 다 끊어지다 보니 어느 한 부분을 지원해서는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효과가 없어졌다”며 “정부가 을을 보호하고 지원하더라도 그 효과가 을에만 머물면 아무 의미가 없어 병정까지 확산되는 루트를 새로 뚫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김 위원장이 강조한 것은 ‘연성법률(soft law)’ 인프라였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규제개혁을 하면서 손톱 밑 가시를 빼낸다는 명분으로 모범규준을 다 없애버렸다”며 “그래서 경성법률에 가해지는 압력이 너무 커졌고 거기 담을 수 없는 사각지대가 생겼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법이나 시행령 등 경성법률(hard law)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 (그렇게 되면) 비용을 부담하는 국민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 국민을 통합시킬 수 없다”며 “자율규제나 모범규준 등 이해당사자가 만들어가는 연성법률이 더 활성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이 중소기업중앙회 같은 이익단체에서 자율규제기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모든 단체가 자율규제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체 회원사 일부의 이익만 대변하는 왜곡된 모습을 보여왔다”며 “최근 중견기업연합회가 자체적으로 윤리위와 징계위 등의 절차를 만들겠다고 하던데 그런 모습이 확산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사진=권욱기자 정리=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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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경북 구미 △서울 대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박사 △1994년~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방문교수 △1997~1998년 노사정위원회 경제개혁소위 책임전문위원 △1999~2001년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 △2001~2006년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2006~2017년 경제개혁연대 소장 △2015~2017년 한국금융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