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캐릭터 그 자체로 변신하는 배우 박혁권이 처음으로 스릴러 장르에 출사표를 던졌다. 오는 17일 개봉을 앞둔 ‘장산범’(허정 감독, 스튜디오 드림캡쳐 제작)은 목소리를 흉내 내 사람을 홀린다는 ‘장산범’을 둘러싸고 한 가족에게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
영화 속에서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하고 다정한 가장 ‘민호’ 역할을 맡은 박혁권은 “빈틈없이 짜여진 시나리오”라며 영화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 박혁권은 뭔가 사연이 있어보이는 의뭉스러운 롤이 아닌 평범한 남편으로 나선다. 개성 있고, 반전 있던 그간의 작품 속 모습과 사뭇 다르다. 반전을 기대한 기자들에게 “반전이 없는 게 반전이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감정 과잉 없이 중심을 잡고 가는 역이라 끌렸다”고 답했다. 특히 촬영 기간이 겹쳤던 SBS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 역할과 달리 중심 잡는 역할을 해봐도 좋을 것 같았단다.
“아빠 민호는 모성애에 치우친 아내 희연에게서 중심을 잡고 정체불명의 어린애(신린아)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해요. 직접적인 공포는 희연과 어린 여자 아이가 해요. 전 그들을 뒷받침 하는 역할을 해요. 보여줄 게 많지 않고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역할도 아니에요. ‘육룡이 나르샤’ 땐 바람잡이 역할은 물론 나대는 역할을 했는데 이번엔 반대로 중심을 잡아줘요. 그 점이 매력 있었어요.”
사실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 역할은 배우가 맛깔스럽게 살려내기만 한다면, 임팩트적인 면에서 강한 파급력을 남길 수 있다. 반면 ‘장산범’의 ‘민호’ 역할은 수위조절이 되지 않으면 지나치게 도드라져 보이거나, 반대로 존재감이 없는 인물로도 남겨질 수 있다. 베테랑 배우인 박혁권 역시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길태미는 강한 캐릭터라 제약 없이 뭐를 해도 됐어요. 이번 ‘민호’ 역할은 오히려 꼼꼼하게, 전체적인 부분을 많이 배려해야 했어요. 허정 감독님이랑 제일 많이 이야기 했던 부분이 ‘과하지 않아요?’ 였어요. 미션 자체가 그거였으니까 그것을 잘 하는 것도 제 목표가 될 수 있었다고 봐요. 민호가 어느 부분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지 수위조절에 신경써야 했어요. 이 친구의 포지션에 따라 정아씨가 어느 쪽으로 가는 게 두드러져 보일 수 있어서 그걸 잡는 게 목표였던 것 같아요.
허정 감독이 세련되게 편집을 잘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 박혁권은 허정 감독의 독특한 화법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직언가인 박혁권과 달리 직언을 하지 못하는 허정 감독은 늘 긴 대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감독님이 직언을 못하는 병이 있다면, 반대로 전 꼭 직언을 해야 하는 병이 있어요. 감독님이 배려심이 많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돌려서 이야기하는 편이세요. 감독님이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면, 전 ‘확 일어나면 되죠?’ 라고 말하는 식이요. 제 입장에선 왜 돌려서 길게 이야기 하시지? 다른 의도가 있나란 생각이 드니까요. 다른 때는 말이 별로 없는데 디렉션 하거나 이럴 때만 말을 길게 하세요. 가끔은 저 얌전해보이고 조용하신 성격의 감독님이 영화 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놀래 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는 게 재미있어요.”
그는 ‘장산범’을 통해 스릴러의 매력을 알게 됐고, 범 아시아권 배우인 이준혁의 엄청난 몸놀림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고 한다.
“일반 영화가 인물들의 감정에 충실한 채 정확하게 보여주면 끝나는데 스릴러의 경우는 감정 보여주는 걸 이용해서 다른 어떤 걸 유도해야 해요. 공포든, 놀람이든 딴 장르보다 한 단계 더 공정이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작품을 꽤 많이 했었는데, 준혁씨 연기를 보면서 그 분야에서는 한국에선 따라올 사람이 없을거다고 느꼈어요. 일반적인 것에서 살짝 벗어난 무속 연기 등 이 분야에선 범아시아권 배우죠. 국내에서 대적할 만한 배우가 없어요. 마임전공으로 유학도 갔다오시고 공부를 계속 하셔서 몸이 상당히 유연해요.”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연극 ‘서울노트’ 등 대학로 배우부터 시작해 어느덧 데뷔 25년차를 맞은 박혁권이지만 대중에 이름 석자를 남겼던 작품은 2014년 JTBC ‘밀회’를 통해서다. 이후 SBS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 역으로 주목 받고 MBC 예능 프로그램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미지가 드라마, 영화, 연극 무대 마다 각기 달랐다는 점. 영화 쪽에서 주로 맡은 롤은 코믹스런 이미지였고, 드라마 쪽에선 ‘초인가족’ ‘육룡이 나르샤’ 이전엔 엘리트 의사 및 검사 역할을 주로 맡았다. 연극 쪽에선 보다 잘 생긴 역할을 도 맡았다.
“저를 바라보는 이미지가 다양하다는 걸 보고 저 역시 의아했어요. 드라마쪽에선 객관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절 보고 있고, 영화 쪽에선 희한하게 뭔가 비어있고 웃긴 있는 사람으로 보더라구요. 솔직히 제 얼굴이 못생기진 않았는데, 영화쪽에서 정우성이랑 겨루겼어요? 상대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으니까 또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나 싶어요. ”
“사람처럼 보이게 연기하고자 한다”고 말한 그는 스스로를 ‘호환성이 좋은 배우’라고 칭했다.
“진중한 연기도 할 수 있고, 웃긴 연기도 할 수 있어요. 제가 호환성이 좋은 배우인가 봐요. 하하. 제가 향이 강하진 않잖아요. 그래서 여기 저기 쓸 수 있는 재료가 되지 않나. 외모도 그렇고, 그래서 호환성을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위트 있는 유머를 섞으며 인터뷰 분위기를 경쾌하게 이끌어가는 박혁권, 알고 보면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도 조심하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박혁권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일이든 정확하게 맺고 끊으려 하는 그를 두고 누군가는 까다롭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정확하려고 노력을 기하는 그의 성격 탓이다. 줏대 있는 그의 성격은 믿음이 갔다.
현재 여름 극장가를 강타한 외국 공포물에 비해 ‘장산범’이 좋은 이유에 대해 묻자, 정확한 그의 성격이 묻어나왔다.
“일단 자막을 안 봐서 좋아요. 올 여름 유일한 국내 공포물이잖아요. 하하”
“그동안 흥미를 느낄 만한 공포영화가 거의 없었어요. 맥락 없이 놀라게 하거나 과장된 장면으로 공포를 조성했는데 저희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을 예로 들면 ‘먹을 만 한 걸 팔아야지’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저희 영화는 그 값을 할 영화입니다. 영화 평들 잘 보고 결정하세요. 후회하지 않는 결정이 되었으면 해요.”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