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뜻하는 레드라인의 구체적인 경계를 못 박고 나서면서 적절성 여부를 놓고 말들이 많다. 야권은 물론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전략적 모호성을 깨뜨린 실언(失言)”이라는 다소 비판적인 견해가 많다.
레드라인 발언을 둘러싼 논란을 항목별로 짚어봤다.
①민감한 안보전략 노출…정책 운신의 폭 좁아져=우선 국군 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이 매우 민감한 안보 현안을 공개적으로 노출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힘겹게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이 일시에 깨지면서 대북정책에 대한 우리 정부의 운신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울경제신문 ‘펠로(Fellow·자문위원)’인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은 “모호성 전략이 필요한데 내부적으로 감춰야 할 패를 미리 꺼내면 북한이 우리 의도를 훤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며 “문 대통령의 레드라인 발언은 외교·군사적으로 맞지 않는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레드라인 언급으로 한국 정부가 규정하는 레드라인은 이미 공개됐지만 미국은 여전히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어 동맹국 간에 엇박자가 날 수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②북한 오판 초래 우려…“레드라인 이전까진 실험 용인?”=레드라인 발언의 더 큰 맹점은 북한이 아전인수 격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이 넘어서는 안 될 금지선을 못 박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북한이 “레드라인에 못 미치는 미사일 도발은 언제든지 감행해도 괜찮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는 이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핵탄두 탑재를 레드라인이라고 했는데 그전까지는 실험을 허용한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와 함께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지 않으면서 추가 미사일 도발에 나설 경우 한국 정부가 이전보다 강력한 압박과 제재에 나설 명분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남 원장은 “레드라인을 그렇게 멀찌감치 잡으면 북한의 위협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라며 “북한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인식이 여전히 안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③ICBM 핵탄두 탑재 여부 검증 힘들어=그렇다면 문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ICBM 핵탄두 탑재 여부를 검증하는 것은 가능할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기술적으로 힘든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북한이 ICBM에 핵탄두를 실었는지를 판단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며 “북한이 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레드라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경 펠로인 신율 명지대 교수도 “레드라인의 기준도 모호하지만 핵탄두 탑재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설명했다.
④레드라인 규정 놓고 한미 이견 노출 우려=아직까지 미국은 레드라인과 관련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향후 한미 간 협상 과정에서 레드라인을 놓고 이견이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 지정학적 요건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도 다른 한미 양국은 각자가 생각하는 ‘핵 도발의 레드라인’에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먼저 전략적 모호성을 깨트려 미국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의 협상에서도 양국이 마찰을 빚는다면 결과적으로 레드라인 발언이 한미동맹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⑤北 레드라인 침범 시 제재 방안 없어=문 대통령이 레드라인의 규정을 공식화하면서도 막상 북한이 ‘금지선’을 넘었을 경우에 대한 제재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확고한 대응 조치를 미리 경고함으로써 북한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셈이다. 서경 펠로인 이상일 전 새누리당 의원은 “대통령 말씀대로 전쟁이 없길 바라지만 전쟁을 각오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언급도 없었다”며 범(汎)부처 차원의 대응 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나윤석·박효정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