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른팔로 알려진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북핵동결-주한미군 철수’ 빅딜 카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한국이 미중 헤게모니 싸움에서 작은 도구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배넌 수석은 16일(현지시간) “중국이 북한 핵 개발을 검증할 수 있게 동결시키고 미국은 한반도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협상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협상은 요원해 보인다”고 일단 선을 그었지만 트럼프 정부의 핵심 참모가 주한미군 철수를 밝힌 것은 ‘코리아 패싱(건너뛰기)’ 우려를 키우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북핵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북핵 동결과 미군철수를 바터(교환) 형식으로 처리하겠다는 구조로 풀이된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안정 주도권을 주장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이 용도 폐기될 수 있는 상황까지 초래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6·25전쟁 발발 원인이 된 ‘애치슨 선언’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배넌 수석은 “우리는 중국과 경제전쟁 중”이라며 “나에게 중국과의 경제전쟁은 모든 것이고 우리는 모두 미친 듯이 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한미 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중국의 주장을 수용하고 대신 북핵 동결을 얻어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자연히 한국 외교가 설 자리는 없어지고 한국 정부는 북핵 해법의 들러리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한반도 위기를 미중 헤게모니 수단으로 삼나=배넌은 현재 한반도 위기를 중국과 미국의 ‘경제전쟁’으로 인식했다. 경제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주한미군이 걸림돌이 된다면 한국의 안보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미국 우선주의 논리가 주한미군 철수로까지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한미군 철수와 북핵 동결의 빅딜로 중국과의 동북아 패권전쟁을 무리 없이 끝내는 것이 우방 한국의 안보를 지키는 것보다 우선시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앞서 미국 조야에서 주한미군 철수 카드가 언급됐을 때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종식을 위해 중국이 북한에 강력한 제재를 했을 경우에 한해 거론된 것이지만 북핵 동결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가 빅딜 옵션으로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중 빅딜 나서면 한반도 운명은 미중 손에=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역할론’을 강조하는 것도 미중 빅딜설의 근거가 된다. 중국 역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한국이 대화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 문제에 있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며 이례적으로 이를 비판하면서 채찍과 당근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통미봉남’을 내건 북한에 이어 중국 역시 한반도의 문제를 미국과 해결하려고 나선다면 문 대통령의 ‘운전자’론은 힘을 잃을 수도 있다.
◇방위비 분담을 위한 포석인가=배넌의 발언은 한국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협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는 분석도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절차에 돌입한 가운데 주한미군 철수라는 폭탄발언으로 방위비 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의 목소리를 키우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판단에서다. 문 대통령이 방미했을 때도 미국은 방위비 문제를 거론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배넌의 발언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입장이다. 정경두 합참의장 후보자는 18일 인사청문회에 참석해 주한미군 철수뿐 아니라 훈련 축소까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정 후보자는 배넌 수석의 발언 외에도 북한 핵 문제 협상 수단으로 한미 연합훈련 축소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현재 그런 부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