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 수장들이 26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잭슨홀 심포지엄에서 향후 통화정책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유럽중앙은행(ECB)이 느리고 조용하게 통화정책의 ‘출구’를 찾고 있다는 신호로 시장은 해석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양 거두는 대신 금융규제 완화와 보호무역주의를 한목소리로 비판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강한 경고장을 날렸다.
재닛 옐런 미 연준 의장은 지난 25일 미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세계 중앙은행장 연차총회(잭슨홀 미팅)’에서 ‘금융안정’을 주제로 연설했지만 금리 인상 등 추가 긴축에 대해서는 별다른 발언을 내놓지 않았다. 옐런 의장은 20쪽 가까운 분량의 연설문 중 통화정책과 관련해서는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대부분을 금융규제 정책에 할애했다.
올 상반기에만 두 차례 금리 인상을 단행한 연준 의장이 연례 최대의 연준 행사에서 통화정책에 관한 언급을 삼가자 시장은 오는 12월 금리 인상 가능성이 낮아진 것으로 분석했다. 연준은 앞서 금리 인상 점도표에서 올해 세 차례 인상을 시사, 연말 추가 금리 인상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방기금(FF) 금리선물 시장이 예상하는 12월 금리 인상 가능성은 옐런 의장의 연설 직전 45.4%에서 이날 37.4%로 뚝 떨어졌다.
예상보다 더딘 금리 인상 전망에 외환시장에서 달러가치도 약세를 보여 유로·엔 등 6개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인덱스는 전날보다 0.8% 떨어진 92.52로 마감했다. 반면 뉴욕증시는 호조로 마감됐다. 경제매체인 CNBC는 “옐런 의장이 통화정책에 대해 별 힌트를 주지 않은 것은 증시에 호재가 됐다”며 “금리 인상이 느린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주고 있다”고 전했다.
옐런 의장에 이어 잭슨홀에서 3년 만에 연설한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역시 시장의 관심이 집중된 ECB의 양적완화 축소 시점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드라기 총재는 주요 중앙은행들이 상당한 수준의 통화완화 조치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혀 회복세를 보이는 유로권 경제에 ‘테이퍼 탠트럼(긴축 충격)’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했다.
옐런 의장과 드라기 총재는 이처럼 자신들의 영역인 통화정책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지만 트럼프 정부의 금융규제 완화와 보호무역 강화에는 일침을 가하며 견제했다. 옐런 의장은 “금융제도 강화와 금융개혁 덕분에 신용대출이 좋은 조건으로 이뤄지고 최근 경제활동에 힘입어 대출이 늘어났다”고 강조해 금융규제로 중소기업 등이 돈을 빌리기 어렵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는 이어 “2007~2009년 금융위기가 초래한 대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며 “위기 이후 금융개혁은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내년 2월 임기가 끝나는 옐런 의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소신을 분명히 하자 그가 다음달 연준의 보유자산 축소 시작과 점진적 금리 인상 등 통화정책 정상화를 끝낸 뒤 명예롭게 은퇴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드라기 총재도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보호무역주의로의 전환은 세계 경제의 잠재 성장과 생산성의 계속된 제고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우리는 보호무역주의의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