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일본의 산업혁신기구(INCJ)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경영난에 직면한 샤프가 최종 합의 단계에 이르렀던 산업혁신기구의 출자 제안을 거부하고 대만 홍하이그룹의 품에 안기겠다며 돌연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샤프 출자를 통해 도시바의 백색가전과 재팬디스플레이(JDI)와 통합함으로써 일본 전자산업의 재편이라는 큰 그림을 구상한 산업혁신기구로서는 일격을 맞은 셈이다. 당시 홍하이 측은 샤프를 달래기 위해 정부 자금을 사용하는 산업혁신기구의 근본적인 한계와 고용 승계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는 후문이다.
일본 산업혁신기구는 정부가 95%를 출자하고 26개 기업이 공동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관제펀드다. 지난 2012년 출범한 아베 신조 정부가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산업경쟁력강화법을 만들면서 산업 재편 과정의 핵심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다. 투자 영역도 초기에는 첨단기술과 특허 사업화가 주요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유망사업 재편, 자금력이 취약한 기업 지원 등 제한이 없을 정도로 일본 구조조정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산업혁신기구는 일본의 국부 증진을 위해 활동한다는 목표 아래 구조조정에 적극 개입하거나 인공지능(AI)·바이오 등의 신성장 산업에 투자하고 있다. 2012년에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겠다며 소니·히타치·도시바 등 3개사의 중소형 액정사업을 통합해 JDI를 출범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막대한 국민 세금을 쏟아붓고도 만년 적자에 시달리는 등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해 관 주도의 퍼주기 논란에 휩싸여 있다.
도시바가 이달 말 협상 마무리를 목표로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도시바메모리 매각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우선협상 대상자였던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의 도시바메모리 인수가 사실상 어려워졌다고 한다. 양사 간 합의가 성사되면 현재 한미일 연합에 속한 산업혁신기구는 WD연합으로 진영을 갈아타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기술 유출을 우려한 일본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각국 정부가 저마다 국익을 지키겠다며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세상이다. /정상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