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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가야금 명인 황병기]"대학때 좋아했던 미당의 '광화문'...우리의 음률에 실어 표현했죠"

슬픔속에서 뿜어낸 빛처럼

기쁨의 자락 놓치지 않았던

광명사상 두루 알리고 싶어

50년 함께한 집사람 한말숙과

금반지 나눠 낀 조촐한 금혼식

새로운 시도들 참 많이 했지만

내 작품 기억되길 바라진 않아

가장 인상 깊은 공연 꼽으라면

앞으로 해야 할 공연 아닐까



“슬픔과 기쁨은 다른 게 아니랍니다. 슬픔을 머금은 사람에게 나오는 기쁨이 참다운 기쁨이지요.”

‘가야금의 명인(名人)’ 황병기(81·사진)에게서는 이 시대의 거장다운 넉넉한 품이 느껴졌다. 음악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를 늘 열망했기에 “현대인의 정신을 해독시켜 주는 음악”이라는 세간의 평에 가장 뿌듯해하곤 했던 그였다. 창작이 없던 국악에 창조의 숨결을 불어넣고 남북한 음악 교류에 중단 없는 애정을 보여왔던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를 지난달 28일 서울경제신문이 인천 청라의 엘림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오는 9일 이 무대에 오를 그의 신작 가곡 ‘광화문’ 초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슬픔과 기쁨이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선문답 같은 얘기부터 그렇지만 도인(道人) 같기도, 때로는 기인(奇人) 같기도 한 그의 화법에는 묘한 여운이 있었다.

“몇 십년 만에 만나는 이산가족들을 보세요. 울기부터 하잖아요. 왜 웁니까. 슬프니까 우는 겁니다. 왜 슬픕니까. 굉장히 기쁘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이다. 명인은 이어 “이산가족을 만나는 거나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는데 그게 사실은 슬픔 속에 기쁨이 극치에 도달해 그 슬픔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슬픔의 반대말이 기쁨인 것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은 하나라는 그의 말이 알듯 모를 듯했다.

슬픔과 기쁨은 하나라는 것을 에두르지 않고 직설하려 한 것일까. 황병기는 이번 신작 가곡 ‘광화문’에서 광명사상을 앞세웠다. 우리 민족의 광명사상을 두루 알리고 싶었다는 명인은 “보통 우리나라를 어두운 나라로 많이들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빛을 존경하고 좋아했는지 드러내는 사상”이라 강조했다. 가곡 ‘광화문’은 서정주의 시 ‘광화문’에 곡을 실어 작곡했다고 했다.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큰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어느 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는 서정주의 시어에 명인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보통 우리나라의 시는 어느 특수한 상황에 대해 서술하는데 미당의 ‘광화문’은 우리 민족, 우리나라 전체의 광명사상을 표현하는 시라 좋아했다”면서 “대학 시절 교과서에 실린 시를 접했을 때부터 좋았다”고 말했다.

명인은 사상적 깊이가 상당하다. 어쩌면 그의 굴곡 있는 삶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부산 피난 시절인 경기중학교 3학년이던 황병기는 1951년 친구(홍성화)의 “가야금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응해 가야금에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업가인 아버지의 반대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 서슬에 황병기는 “아인슈타인도 바이올린을 잘 하지 않느냐”며 고집을 꺾지 않았고 학업과 가야금을 병행하며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숙생’으로 유명한 저음 가수 최희준이 황병기의 법대 동기 동창이다.

법대를 다녔지만 방과 후 국립국악원에 가서 가야금 수업을 듣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당연히 법관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업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젊은 시절 그 역시 사업가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스무 살 법대생 황병기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한 여대생의 ‘예언’을 명인은 잊지 못하고 자신의 자서전에 적었다. “미스터 황은 지금 법대에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눈빛을 보면 알아요. 멀리 딴 세계를 보고 있거든요. 미스터 황은 결국 예술가가 될 거예요”라고. 결국 그 여대생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 됐다. 다만 법과대학에서 지낸 4년은 그에게 법학적인 사고방식을 익히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 됐다.


명인에게 법대 전공이 국악 작곡에 연결이 되는지, 법의 어떤 측면이 도움이 되는지, 법과 국악은 어떻게 통하는지 연이어 물었더니 답이 아리송하다. “법은 모든 것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라고 답했다. “(법에는) 철학 같은 느낌, 그런 것도 있어. 법철학이라는 말도 있잖아. 법이 무엇이냐는 물음, 그것이 결국 음악은 무엇이냐 라는 것으로 통하거든.” 역시 알듯 모를 듯한 명인의 화법이다. 하기야 법과 음악은 본래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기는 하다.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는 고대 동양의 예약(禮樂)사상에서 예(禮)가 제도적 질서라면 악(樂)은 우주와 인간 사회 영역의 질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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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황병기는 전통에 그토록 천착해온 것일까. 그의 첫 창작 가곡 ‘국화 옆에서’를 비롯한 그의 가곡은 하나같이 우리의 역사에 닿아 있다. “조선 시대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뿌리를 두고 직접 자신이 만든 노래”라고 자신의 곡을 소개한 그의 노래는 마치 떠나가는 영혼을 달래는 진혼곡과 같은 느낌을 준다.

혼을 달래주는 황병기의 대표곡을 꼽으라면 역시 1990년 윤이상의 초청으로 방문한 평양의 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초연한 ‘우리는 하나’다.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하나’를 반복한다. 훈과 대금의 소리는 마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고 오르간의 화음은 종교적인 숭고함과 화합을 상징하는 듯하다. 평양 초연에서 소프라노 윤인숙이 ‘우리는 하나’를 불렀는데 당시 윤이상의 평가가 묘하다. “황 선생, 그것 참 재미있는 곡이야. ‘우리는 하나’를 한 번 들으니 호기심이 나고 두서너 번 들으니 지루해지더라고. 근데 대여섯 번이 넘어가니까 상당히 재미나던데”라며 윤이상이 껄껄 웃더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하나’에 황병기는 국악에는 없는 화음을 넣고 오르간을 차용했다. 그 이유를 묻자 명인은 “화음을 넣고 싶어 오르간 연주를 포함시켰다”고 답했다. 반복하는 전쟁에서 고통 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평화를 노래하는 이 노래에 화음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명인은 올해 81세 고령이지만 청년 못지않은 열정가다. 이날 ‘황병기 가곡의 밤-미궁(1975作)부터 광화문(2017作)까지’ 리허설에서도 그의 열의로 분위기가 뜨거웠다. 무엇보다 이날 명인의 ‘미궁’ 연주 모습은 연주자 그 이상이었다. 가야금을 들었다가 내리기도 하고 바이올린 활을 이용해 가야금을 켜고 장구채, 거문고 술대 등으로 가야금의 몸통을 긁기도 한다. 마치 신들린 듯한 모습이다. 올해 70세의 소프라노 윤인숙도 명인의 “마이크를 앞에 두고 서야지”라는 지적에 다소곳할 뿐이다. 명인은 장구를 담당하는 김웅식에게는 “노래가 끝날 때 딱 쳐서 끝내야지, 아까는 잘하더니 지금은 왜 안 맞춰”라고 묻더니 훈을 담당하는 홍종진에게는 “음을 잘 맞춰줘야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결코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애정 어린 꼬장꼬장함이 묻어났다.

명인은 주변에 인복도 많은 편이다. 작곡가 윤이상과는 젊은 시절부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남북한 음악 교류 사업에 함께 힘썼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그의 고교 4년 선배이자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였다.

명인의 부인은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했던 소설가 한말숙이다. 그에 비해 다섯 살 연상이기도 한 아내로부터 시를 고를 때 도움은 받는지, 아니면 창작에 어떤 영감을 얻는지 넌지시 물었더니 그는 얼른 통박을 놓는다. “아냐, 아무하고도 의논 안 해. 내가 봤을 때 맘에 들면 하는 거지.” 그러나 2012년 그의 에세이집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를 보면 일생의 반려자에 대한 사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집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낫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살다 보니 어언 50년이 되어 금혼식도 집사람이 하자는 대로 했다. 서로 금반지를 하나씩 사서 끼워주고 가까운 친척만 초청하여 점심을 먹었다.”

후회도 없고 아쉬움도 없는 삶이라는 게 가능한 것일까. 황병기는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거 없어. 해보고 싶은 것도 없고 기억해주길 바라지도 않아”라고 했다. “죽고 나면 작품도 모든 것들과 함께 잊혔으면 해. 그걸 후세 사람들이 배운다는 것은 작년에 진 국화 꽃잎을 코에 비비는 격이지.” 한용운 시인이 자신의 시를 후손에 읽히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작년에 진 국화 꽃잎을 코에 비비는 것 같다’고 한 표현까지 인용하며 명인은 손사래를 쳤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명인은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무엇이냐고 묻자 엉뚱하게도 “앞으로 할 공연이 기억에 남을 거야”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1962년 ‘국화 옆에서’와 ‘숲’을 시작으로 1974년 ‘침향무’와 1975년 ‘미궁’을 거쳐 2017년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창조적 예술에 전념했고 그의 창조는 현재 진행 중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향해온 황병기는 또 다른 창작을 지향하고 있다. 명인은 “가곡이라는 게 슈베르트 가곡이나 홍난파·윤이상 가곡을 먼저 떠올리는데 서양 음악의 가곡과 우리나라의 가곡은 전혀 다른 것”이라며 “서양의 가곡은 메이지(明治) 시절 일본이 독일의 리드(Lied·독일어로 노래라는 뜻)를 단순하게 번역해서 가곡이라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과 전혀 무관하게 선비들의 노래로 가곡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도들을 참 많이 했지만 이미 내 몸속에는 전통이 쫙 들어 있기에 전통음악의 형식 속에서 새로운 창작을 해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이호재기자

우영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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