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독일 현지시간)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부문장(사장)이 언론에 이재용 부회장의 실형 선고와 관련한 심경을 토로한 것은 그룹 내 오너 부재의 그림자가 그만큼 짙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 ‘총수 없이도 삼성전자의 경영 성과가 뛰어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현직 최고경영자(CEO)의 입을 통해 “이는 현실을 모르는 얘기”라고 정면 반박한 셈이다. 특히 거대 항공모함에 비견되는 삼성그룹에서 오너의 ‘고독한 결단’이 그간 얼마나 큰 역할을 해왔는지 새삼 강조함으로써 여론도 우호적인 방향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감지된다.
윤 사장이 오너십을 강조한 이유는 명확했다. 삼성전자 내 최고 간부인 부문장이라 하더라도 대규모 인수합병(M&A)이나 사업구조 개편을 주도할 수 없다는 근거에서다. 1척의 배를 책임지는 ‘선장’과 여러 어선을 총감독해야 하는 ‘선단장’의 무게감은 다르다는 것. 그는 “지금 업계는 음성인식,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등으로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구조를 재편해야 하는 시기”라며 선장만 있고 선단장은 없는 현 상황을 우려했다. 이런 위기감은 “함대라도 배가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 “(제가 요즘) 잠도 잘 못 자고 겉은 웃지만 (속은) 참담하다”등의 표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시장에서는 반도체·스마트폰 이후 삼성그룹의 재도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신사업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간 전문경영인이 내릴 수 없는 조 단위의 과감한 투자를 통해 삼성이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제는 이를 기대하기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9조3,000억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해 전장기업 하만을 인수한 후 그룹 내 굵직한 M&A는 자취를 감춘 상황이다. 윤 사장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중장기 전략 수립이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특정 사업에 한정된 경영계획은 사장이 짤 수 있지만 3년 후, 5년 후를 바라보며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결국 오너의 몫”이라며 “이 부회장이 현장에서 글로벌 리더들을 만나고 인사이트를 갖고 미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하나도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하지만 그룹 내 컨트롤타워의 부활에 대해서는 “말할 입장이 아니다”는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계열사별로 ‘각자도생’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 부회장의 항소심 등을 앞둔 마당에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기도 만만치 않음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자리에서 윤 사장은 사업전략도 밝혔다. ‘인공지능(AI) 스피커’ 출시 소식은 주목되는 대목이다. 윤 사장은 “하만과 무선 사업 및 생활가전(CE) 부문이 힘을 합쳐 내년쯤 경쟁력 있는 기술력을 접목한 AI 스피커를 내놓을 것”이라며 “기대해도 좋다”고 자신했다. 이날 간담회에 함께 나온 고동진 무선사업부장(사장)은 음성인식 AI인 ‘빅스비’를 통한 경쟁사와의 협력을 강조했다. 고 사장은 “빅스비가 추구하는 방향과 구글 어시스턴트의 방향이 일부는 같고 일부는 다르다”며 “비전을 공유한다면 구글이든 아마존이든 협력할 부분은 협력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베를린=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