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현(21·KB금융그룹)은 키 169㎝에 가녀린 몸매에도 장타자에 속한다. 철인 3종경기를 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선지 드라이버로 평균 260야드를 너끈히 날린다. “그저 세게 빠르게 치는데 정확도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는 설명.
‘반전 골퍼’ 오지현이 자신을 둘러싼 또 하나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메이저대회를 제패하기에는 담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는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
3일 강원 춘천의 제이드팰리스GC(파72)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한화 클래식. 총상금 14억원의 KLPGA 투어 최대 상금 대회이자 올해 메이저로 승격한 이 대회에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와 일본 투어의 강자들을 모두 따돌리고 오지현이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나흘 합계 13언더파 275타의 2타 차 우승. 주최 측은 김인경(6언더파 공동 5위), 제시카 코르다(5언더파 공동 9위·미국), 에리야 쭈타누깐(이틀간 19오버파 최하위·태국), 이민영(5언더파 공동 9위) 등 미국과 일본 투어의 실력자들을 대거 초청했으나 모두 오지현을 넘어서지 못했다. 생애 첫 메이저 우승으로 시즌 2승이자 지난 2014년 데뷔 후 통산 4승. 우승상금 3억5,000만원을 거머쥔 오지현은 시즌 상금랭킹 8위에서 단숨에 3위(6억3,400만원)로 뛰어올랐다.
4타 차 리드를 안고 출발한 최종 라운드였지만 우승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러프에 빠지면 1타는 금세 잃을 정도로 까다로운 코스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더욱이 오지현은 지난달 13일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 1타 차 선두로 최종일을 맞고도 10위 밖에서 마감한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76타를 치는 바람에 우승자에게 9타나 뒤진 공동 11위로 떨어졌다. 고질적인 무릎 통증 탓이 컸다.
3주 만에 다시 우승 기회를 잡은 오지현은 그러나 3주 전과 완전히 달랐다. 첫 홀부터 버디를 잡은 그는 8번홀(파4) 보기로 4타 차로 따라 잡혔지만 다음 홀에서 2위 정예나의 보기에 다시 5타 차로 달아났다. 티샷 실수 뒤 레이업으로 러프에서 탈출한 12번홀(파5)에서는 200m 거리에서 볼을 그린에 떨어뜨려 탄성을 자아냈다. 그린 밖으로 굴러 내려간 볼을 파로 마무리한 오지현은 13번홀(파3) 보기 뒤 5개 홀을 파로 막으며 경기를 마쳤다. 최종일 스코어는 버디와 보기 2개씩의 이븐파 72타. 김지현(롯데)이 마지막 두 홀을 버디로 마치며 2타 차까지 쫓아왔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단독 2위였던 정예나는 2타를 잃고 7언더파 4위로 마감했다. 상금 1위 이정은은 1언더파 공동 23위.
오지현의 우승에는 무려 7타를 줄이며 공동 2위에서 4타 차 단독 선두로 점프한 3라운드가 결정적이었다. 15m 버디 퍼트를 넣을 정도로 감각이 최고조였다. 특히 18번홀(파5)에서 선보인 위기관리 능력에 엄청난 탄력을 받았고 거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마지막 날 끝까지 선두를 놓지 않았다. 드라이버 티샷이 오른쪽 덤불로 숨어 ‘언플레이어블’을 선언, 1벌타를 받았지만 오지현은 9번 아이언으로 레이업 한 뒤 120야드 거리에서 48도 웨지로 홀 1.5m에 붙이고는 가볍게 파를 지켜냈다. 경기 후 오지현은 “3주 전 대회 때 역전패한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생애 첫 메이저 우승도 나온 것 같다”며 “시즌 2승을 했으니 3승이 목표다. 10승 할 때까지 골프백을 안 벗겠다는 아버지(캐디)와 다시 출발선에 서겠다”고 했다.
한편 프로 데뷔전에 나선 최혜진(18·학산여고3)은 이날 이글 1개와 버디 6개(보기 1개)로 무려 7타를 줄이는 뒷심을 발휘했다. 자신의 첫 홀인 10번홀(파4)부터 칩인 이글을 터뜨렸다. 전날까지 공동 43위였던 그는 합계 6언더파 공동 5위로 마무리, 상금 4,095만원과 데일리 베스트 스코어 상품인 한화호텔&리조트 상품권(50만원)을 받았다. 최혜진은 올 시즌 아마추어로 KLPGA 투어 2승, LPGA 투어 US 여자오픈 준우승 등의 성적을 낸 뒤 프로 신분으로 첫 대회를 치렀다.
경기 후 최혜진은 이번 대회에 스스로 점수를 매겨달라는 요청에 “오늘은 거의 만점을 줄 만한데 나흘 경기를 종합한다면 85점을 주고 싶다”고 했다. “샷 실수가 나왔을 때 코스 안에서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편인데 차분하게 다음 샷과 다음 홀 만회를 준비하는 자세를 선배 언니들한테 배워야겠다”는 설명. 아마추어 신분이라 받지 못한 상금이 올 시즌만 거의 10억원에 이르는 최혜진은 이번에 받은 첫 상금으로 부모님과 친오빠를 위한 선물을 사겠다고 했다. 오는 14일부터 프랑스에서 열릴 LPGA 투어 메이저 에비앙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그는 “톱10을 바라보고 갈 것”이라고 했다.
/춘천=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