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이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지만 자신이 살해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만은 잃지 않는다. ‘망각이라는 축복’은 어찌 된 일인지 연쇄살인범이자 치매에 걸린 병수(설경구 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강렬한 서스펜스로 아프게 그려냈다.
병수는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부터 누나와 함께 살인적인 구타를 당하고 살았다. 아버지의 폭력이 극심한 어느 날 병수는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첫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병수는 ‘청소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죽이기 시작하면서 연쇄살인범이 된다. 가족을 죽을 만큼 패는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횟집 주인부터 다이아몬드 반지를 삼킨 애완견을 죽인 후 배 안에서 그 반지를 꺼내달라는 견주 등을 병수는 쓰레기를 치운다고 생각하며 살인을 한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중년이 된 병수는 치매에 걸리게 된다. 병수는 그날그날 했던 일들을 녹음기에 저장하며 치매와 싸우고, 딸 은희(설현 분)가 그 옆에서 그를 극진히 돌보지만 딸을 잘 못 알아볼 때도 있다. 그러던 중 병수는 접촉사고를 당하게 되고 상대방 차량의 주인인 태주(김남길 분)에게서 ‘살인자의 눈빛’을 감지해낸다. 이후 태주는 병수의 주변에 머물며 점점 병수를 위협하는 가운데 은희와 가까워진다.
김영하의 동명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영화로 한 이 작품은 연쇄살인범이라는 뼈대는 가져왔지만 각각의 캐릭터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병수의 기억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 혼돈을 만들어내는 복잡한 플롯으로 전개된다. 연출을 맡은 원신연 감독은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많은 축으로 캐릭터를 그려내야 했기 때문에 태주가 중요해졌다”며 “태주가 자체로서도 존재하지만, 영화로 구성을 하면서는 태주의 모습 자체가 병수 캐릭터의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원작과 달라진 점에 대해 설명했다.
살인과 죽어 마땅한 사람에 대한 사적인 복수는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병수가 살인 대상으로 삼은 이들은 관객들에게 “저러고도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복종과 극복이라는 모순적인 대상이다. 병수는 아버지의 폭력에 무참히 복종당하다 아버지 살해라는 반인륜적인 방법으로 아버지를 저버린다. 아버지만 없으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병수는 아내의 불륜까지 목격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일들과 사투를 벌인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살인범이 된 것이다.
병수 역의 설경구는 극한 감정의 연기의 대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살인을 저지를 때의 눈빛,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 현실과 과거, 팩트와 환상이 헷갈리는 혼돈이라는 극한의 감정을 이른바 ‘미친 연기’로 관객을 압도한다. 또 한 명의 연쇄살인범 태주 역의 김남길 역시 설경구라는 대배우에 밀리지 않고 극한의 감정을 서늘하게 표현했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연쇄살인범 병수와 태주의 격투신은 ‘악과 악’의 대결로 온전히 두 배우가 만들어낸 처절한 장면으로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가슴 아픈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6일 개봉
사진제공=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