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구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첫째는 바다를 포함한 물이고 둘째는 산소며 셋째는 중력이다. 넷째는 태양이고 다섯째는 초목이며 여섯째는 다른 생명이고 일곱째는 이웃이다. 여덟째는 굳은 땅이고 아홉째는 빛과 어둠이며 열째는 달과 별이다. 아. 가장 소중한 게 있다. 열한 번째가 시간이고 열두 번째가 공간이다. 그리고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이 모두 있어야 가능하다.
이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심지어 개미·벌·지네·지렁이·쥐·독사·악어·사자·코끼리·하이에나·모기·바퀴벌레·박테리아·곰팡이까지도 인간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리고 굳은 땅이 필요하다. 굳은 땅이 있기 위해서는 지구의 역사와 함께 액화암석이었던 때를 지울 수 없다. 지구 초기는 펄펄 끓는 액화암석이었다. 이들 액화암석이 식고 굳으면서 단단히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소중한 땅이 됐다.
지구가 처음부터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펄펄 끓는 액화암석일 때, 이산화탄소 수치만이 높을 때, 산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때, 지옥 유황불이 ‘큰형님’으로 받들 때, 지구는 생명이 살 수 없었다. 골디록스존(goldilocks zone)이 아니고 해비터블존(habitable zone)이 아니었다. 지구는 처음부터 흙과 모래가 아니고 펄펄 끓는 액화암석이었다. 따라서 지구 생물권(biosphere) 중에 대기권(atmosphere)·생태권(ecosphere)·수권(hydrosphere)·암석권(lithosphere)은 있었으나 흙권(mudsphere)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암석이 바람에 부서지고 빗물에 부서지고 햇살에 부서지고 기온 차에 부서지고 동식물에 의해 부서지면서 돌이 되고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고, 마침내 부드러운 흙으로 변한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지구가 암석형이 아니고 목성·토성·천왕성이나 해왕성처럼 목성형 가스별이었다면 그래도 과연 생명이 살 수 있었을까 하고. 단단하지 않기에 사람은 살 수 없다. 그러나 가스 속에서 사는 생명이 있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에는 자그마치 2,000억개의 별이 있다. 이들 2,000억개 별은 행성이 아니다. 다들 태양처럼 항성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태양계만 놓고 보더라도 하나의 태양을 중심으로 10개 가까이 행성이 있고 100여개가 넘는 위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은하에는 2,000억개의 태양과 함께 2조개에 가까운 행성과 20조개를 넘는 위성이 있어야 한다. 이들 가운데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해비터블 행성을 1%만 잡더라도 우리 은하계에만 200억개가 될 것이다.
정말 멋지고 대단하지 않은가. 지구는 처음부터 해비터블존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의 지구가 된 것처럼 외계행성 중에서도 어쩌면 행성의 역사를 거치면서 생명이 살 수 있는 지역으로 바꿔 갈 것이다.
그런데 이 지구를 이토록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주역이 누구일까. 이는 사람이 아니라 이 우주 이 태양계 이 지구 이 자연계가 함께 만들어온 것이다. 사람은 생명체로서는 지구상에 가장 늦게 참여한 존재다.
우리는 이처럼 아름다운 지구를 놓아둔 채 다른 곳에서 극락을 찾으려 한다. 이토록 소중한 지구에 앉아 엉뚱한 곳에서 천국을 찾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아름답고 훌륭한 지구를 버려둔 채 서쪽으로 십만억(十萬億) 불국토(佛國土)를 지나가 극락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드넓고 황량한 하늘 어디에도 천국은 없다.
가장 늦게 참여한 생명이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사람도 처음에는 겸손했고 겸손하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종교를 태생시켰다. 불교·기독교·이슬람교가 나오기 전에 늪에서 강물에서 바다에서 아궁이에서 낮과 밤에서 동굴 하나에도 나무 한 그루에서도 신을 생각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았다. 호모 사피엔스, 곧 지혜를 지닌 생명이니만치 그만큼 인간은 자연에 대해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겸손을 불교에서는 비움이라 하고 하심이라 한다. 인간이 겸손하면 지구는 천국과 극락으로서의 위치를 영원히, 그리고 굳건히 지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