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이규진 성장기업부장 sky@sedaily.com
“재벌·대기업이 좋은 아이디어를 갖춘 벤처기업을 과감하게 인수합병(M&A)하는 시장 분위기가 조성돼야 합니다. M&A 활성화로 수많은 벤처·스타트업들의 출구가 확보돼야만 기술 창업이 늘고 벤처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안건준(52·사진) 벤처기업협회장(크루셜텍(114120) 대표)은 지난 5일 경기 판교 크루셜텍 본사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벤처기업이 성장하려면 자금력이 풍부한 국내 대기업들이 M&A 시장에 더 많이 들어와야 한다”며 “정부의 벤처 육성 정책도 대기업이 기술력 있는 벤처기업을 제값을 주고 사고파는 M&A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밝혔다.
안 회장은 “미국은 벤처기업 M&A를 통한 투자자금 회수가 74%, 기업공개(IPO)를 통한 자금 회수가 10%대인 데 비해 한국은 M&A를 통한 엑시트 비중이 0.4%도 안 된다”며 “우리나라가 벤처 강국으로 가려면 대기업의 생태계가 벤처 생태계와 조화를 이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와 대기업·벤처 업계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정보기술(IT) 스타트업 모비두가 삼성전자가 조성한 벤처캐피털 투자펀드 ‘삼성넥스트’로부터 투자를 받은 것과 같이 대기업의 벤처에 대한 투자 사례가 많아질 수 있도록 관련 제도의 보완과 인센티브 마련이 필요하다”며 “대기업이 중소·벤처기업을 M&A할 때 피인수 기업의 중소·벤처기업 지위를 계속 인정해주고 인수기업의 법인세 공제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올 2월 회원사 1만3,000여개의 벤처기업협회 회장에 취임한 안 회장은 국내 벤처 창업의 2세대다. 1997년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지기 전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창업에 뛰어들었다. 벤처의 역사가 곧 그의 역사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현재 국내 벤처 업계가 처한 현실에 대한 진단은 날카로웠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통찰력 있는 혜안을 펼쳐 보였다.
그는 특별법이 제정되고 20년이 지나는 동안 국내 벤처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졌지만 산업의 뼈대가 되는 제조업은 취약하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그동안 벤처의 양적 성장에 집착해 소프트웨어와 서비스업 등 손쉬운 벤처 창업을 장려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안 회장은 “우리나라 벤처는 기업 현장과 정책 입안자는 물론 자금을 공급하는 벤처캐피털(VC)까지 너무 유행을 따라간다”며 “게임·소프트웨어, 서비스 관련 사업의 비중이 높은데 이들 산업은 좁은 내수시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장에 한계가 있고 글로벌 경쟁력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어 “결국 해외에서 돈을 벌려면 벤처도 우리가 잘하는 제조업이 우선이고 중심이 돼야 한다”며 “제조 분야의 벤처 창업기업들을 발굴, 육성해 비제조업의 쏠림 현상을 완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덧붙였다.
안 회장은 구체적인 대안으로 신제조업 분야 창업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전용 밸리 조성, 제조와 서비스업 간 협업을 위한 생태계 구축 등을 제시했다. 정부 출자 펀드가 하드웨어 제조 분야에 대해 정책적인 안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복안도 내놓았다.
대형 M&A의 부재가 기존 벤처기업들의 성장을 막고 있다면 연대보증은 새로운 벤처 창업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중소 업계의 현실이다. 이에 대해 안 회장은 “지난 20년간 사업을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그 어떤 나라도 연대보증 때문에 창업을 못하거나 사업을 키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하지만 국내에서 벤처 창업을 하는 사람에게 연대보증은 가장 무서운 현실이고 넘어야 할 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벤처 창업을 하는 사람에게만 빚을 탕감해달라는 것이 아니다”라며 “다만 한번 빚을 지면 무한책임을 강요하는 연대보증을 폐지하고 유한책임 형태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정부 정책자금은 연대보증이 최근 들어 대부분 사라졌지만 민간 금융기관의 대출금에는 여전히 연대보증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다”며 “창업 강국은 돈이 없어도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창업할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될 때 가능하며 그러려면 구시대의 유물인 연대보증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새 정부가 중소기업청을 장관급인 중소벤처기업부로 승격하면서 벤처 업계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뒤섞이고 있다. 벤처 산업이 국가의 성장동력이라는 인식은 변함없지만 벤처 지원 육성 정책이 스타트업과 같은 창업 초기 벤처에 맞춰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안 회장은 “일각에서 창업 초기(5년 또는 7년) 벤처기업만을 대상으로 벤처 지원 정책이 집중돼야 한다고 하지만 이는 벤처 생태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라며 “벤처를 성장단계별로 스타트업과 중견 벤처로 나눠 맞춤형 지원을 해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새 정부가 강조하는 양질의 일자리도 결국 중견 벤처기업들이 몸집을 키우며 성장할 때 나온다”며 “정부의 정책이 스타트업에만 매몰될 경우 벤처의 성장 사다리가 끊기고 새로운 사각지대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중견 벤처 육성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또 같은 줄기에서 정부와 청와대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벤처기업확인제도 역시 인증 범위를 줄일 것이 아니라 전체 벤처 생태계를 고려해 포괄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 회장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벤처 업계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이달 중 ‘혁신벤처단체협의회’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벤처기업협회 주도로 결성된 혁단협에는 △벤처캐피탈협회 △이노비즈협회 △한국여성벤처협회 △IT여성기업인협회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메인비즈협회 △창조경제혁신센터 단체협의회 등이 참여한다. 안 회장은 “중소기업중앙회가 국내 중소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창구지만 산업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지면서 회원사들의 모든 이해관계를 담아내기는 어렵다”며 “혁단협의 존재가치는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혁단협의 회원사인 벤처기업들은 인력구성이나 근로시간·급여체계 등이 기존 중소기업과 많이 다르다”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나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문제 등에서 기존 단체들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밝혔다.
최근 화두인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는 ‘서울 창업 생태계’를 적극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서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합대학을 보유하고 있고 종합병원, 글로벌 기업의 본사와 금융기관들이 한데 몰려 있어 창업자에게는 이보다 더 유리한 환경이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안 회장은 “부처 관계자나 대학교수, 연구기관 박사들을 만나보면 4차 산업혁명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좋은 아이디어가 성공할 수 있는 하드웨어 시설과 콘텐츠·소프트웨어를 모두 갖추고 있는 서울의 창업 생태계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1일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자격 논란에 휘말린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서는 그의 업적과 업무 능력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박 후보자는 학자 출신이면서도 벤처기업과 관련한 풍부한 현장 경험을 갖춘 분”이라며 “정치인도 아닌데 그의 사상을 놓고 검증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후보자가 새롭게 승격된 중소벤처기업부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검증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리=서민우기자 ingaghi@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He is…
△1965년 부산 △1991년 부산대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삼성전자 연구소 선임연구원 △1998년 경북대 정밀기계학석사 △1997년 럭스텍 최고기술경영자(CTO) 겸 기술이사 △2001년 크루셜텍 창업 △2015년 벤처기업협회 수석부회장 △2017년 제9대 벤처기업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