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새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15일 중거리 탄도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면서 미국을 필두로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국제사회가 독자적 대북제재를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은 특히 중국과 러시아도 독자제재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며 중국에 석유공급 차단을 스스로 결단하라고 압박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도 15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인도지원 시기에 대한 고려를 요청하고 나섰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북한의 계속되는 무력 도발에도 기본원칙이라는 이유로 대북 인도적 지원 카드를 고집하고 전술핵 재배치 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반대 입장을 보여 일각에서는 오랜 북핵 위협 속에 정부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게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이날 북측의 탄도미사일 발사 후 성명을 내고 “최근 채택된 안보리 제재안은 우리가 북한에 취해야 할 행동의 천장이 아닌 바닥을 보여준다”면서 “우리는 모든 나라들이 김정은 정권에 대한 새로운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대북 석유공급 제한과 북한 섬유수출 금지 등을 뼈대로 한 안보리의 새 대북제재를 유엔 회원국들이 성실히 이행할 것을 주문하면서 국가별로 별도 제재를 요구한 것이다. 틸러슨 장관은 특히 북측에 영향력이 가장 큰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자신만의 직접적 행동을 함으로써 이런 무모한 미사일 발사를 참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하며 “중국은 북한의 원유 대부분을 공급하고 러시아는 북한 강제노동의 최대 고용주”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자들을 만나 “중국이 원유 공급 중단이라는 아주 강력한 수단을 스스로 채택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대북 압박에 중·러의 역할을 원하는 미국 측은 중국에 독자제재를 가해 압력을 높일 목적으로 미 재무부가 북측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과 기업의 해외 거래를 차단하는 강수를 준비하고 있다. 코리 가드너 상원 외교위 동아태소위원장은 14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이철우 자유한국당 의원 등을 만나 “‘북한 조력자’들을 미국의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하면서 중국의 몇 개 기관을 제재하는 것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미 하원 금융위원회도 행정부의 ‘세컨더리보이콧(북측 관련 제3국 기관 제재)’ 발동을 촉구하면서 북한과 거래한 외국 금융기관에 대해 25만~100만달러의 벌금 또는 최대 20년 이하의 징역형을 부과하는 강력한 대북 금융거래 제재법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EU도 이날 안보리의 새 결의안을 반영해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EU는 탄도미사일 발사에 책임이 있는 북한의 국책 무역은행 등 단체 4곳과 개인 9명을 블랙리스트에 추가해 금융자산 및 거래 등을 동결했다. 아베 총리 역시 15일 문 대통령 취임 후 7번째 통화에서 “한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 시기에 대한 고려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일본·EU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응징 분위기와 달리 우리 정부는 미온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북한이 역대 최장 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한 가운데서도 정부는 전일 발표했던 북한 취약계층에 대한 인도적 지원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이유진 통일부 부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대북 인도적 지원 추진 방침은 유효하냐’는 질문에 “영유아·임산부 등 북한의 취약계층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지속한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이라고 밝혔다. 청와대도 이날 북한의 미사일 도발 하루 전에 징후를 포착했다고 밝혔으나 비상 태세 속에 진행한 미국 CNN방송과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핵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이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나 전술핵을 재배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2주일 전보다 더 강력한 미사일 발사를 준비하며 한반도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한반도 비핵화 원칙만 고수한 셈이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은 “불과 2~3년 전만 해도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하면 마치 ‘꼴통보수’처럼 비쳐졌지만 이제 한반도 안보상황이 직면한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해졌다”고 말했다. /뉴욕=손철특파원 이수민·정영현기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