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제훈은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께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제훈은 ‘아이 캔 스피크’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위안이 되고 관객들에게는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고 소통과 행동을 유발하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
민원왕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 분)과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의 이야기를 그린 ‘아이 캔 스피크’는 상극인 두 캐릭터의 밀당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유쾌한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내 ‘옥분’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진심이 밝혀지며 분위기가 전환되고, 이 영화의 발판이 되었던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문희가 연기하는 ‘옥분’은 현재를 살아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또한 청문회 당시 2명의 한국인 할머니와 함께 증인으로 참석해 눈물로 절규했던 네덜란드 출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잰 러프 오헤른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극화한 ‘미첼’ 할머니의 절박함은 이것이 단지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렇게 모두가 알아야 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현재를 가슴 뜨겁게 보여주는 영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 대한 다른 접근 방식이 다르다. 그 동안 일반군 위안부를 다룬 작품들은 정공법으로 진지하게 접근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휴먼 코미디라는 조금은 훈훈하고 편안한 장르 가운데 진심이 천천히 스며들게 만든 영화이다.
“나 역시 ‘소소하고 훈훈한 이야기구나’ 란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읽다가 후반에 가서 밝혀지는 옥분의 사연을 접하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까지 나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재의 영화들이 역사적 아픔을 정공법으로 돌파했다면 우리 영화는 좀 더 따뜻하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어요. 저 역시 민재라는 캐릭터를 통해 옥분 할머니를 지지해주고 싶었어요. 나문희 선생님을 비롯해 함께 하는 분들에 대한 신뢰 덕분에 출연할 수 있었어요. 영화를 보고 더 감동하고 전율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문희 선배와의 호흡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따뜻함을 경험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만나 뵙기 전에는 하늘같은 선배님이 아닐까 했는데, 실제론 오래 알고 지낸 할머니 같다는 생각 이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첫 대본 리딩 때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선생님께서 ‘제훈씨 연기 너무 좋다.’고 격려해주시면서 항상 저를 웃는 얼굴로 바라봐주셨어요. 틈 날 때마다 선생님과 도란도란 대화하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제가 굳이 어떤 연기를 하려 애쓰지 않아도 선생님을 보면 자연스럽게 리액션이 나왔어요. 선생님의 연기를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충만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문희 배우를 보면서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였지만, 옥분이 어머니 산소에 앉아서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 앞에선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시사회 땐 애써 눈물을 참느라 감정조절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나문희 선생님이 산소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정말 못 참겠더라고요. 옥분에게도 어머니가 있고, 누군가의 딸이었을텐데...굉장히 힘든 삶을 살고 돌아왔지만 가족에게조차 위로받지 못해 넋두리를 하잖아요. 정말 눈물이 핑 돌고 너무 가슴 아팠어요.”
‘아이 캔 스피크’는 강지연 대표(영화사 시선)의 기획에서 출발해 약 4년여간 개발 과정을 거쳐 완성된 프로젝트이다. CJ 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여성가족부가 후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인 ‘아이 캔 스피크’는 75:1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되며 제작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중심엔 약속에 대한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로페셔널한 배우 이제훈이 있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김현석 감독의 존재와 명필름 심재명 대표, 영화사 시선의 강지연 대표가 있어서 믿고 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시나리오를 덮으면서 ‘아 참 좋은 이야기’란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게다가 영화라는 게 작품을 만들었다고 완성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영화로 다가갈지 여부는 제작하고 마케팅을 하고 만드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김현석 감독님이라면 이 영화의 원 의도를 미화하거나 왜곡시키거나 진심을 훼손시키지 않을거라는 자신이 있었어요. 만드는 제작사쪽도 상업영화적인 자극적인 이야기로 포장하지 않겠구나라는 확신이 있었죠. 심재명 대표님, 강지연 대표님, 김현석 감독님, 나문희 선생님 모두가 너무 감사한 분들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촬영을 하면 할수록 행복해지고 기대가 됐어요.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영화를 찍어서 정말 기억이 오래 갈 것 같아요.”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