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논란으로 기업들의 퇴직연금 부채 부담이 커지면서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들이 비상이다. 특히 기업들이 퇴직충당금으로 부채 부담을 안을 경우 퇴직 적립금 운용 규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산운용사들이 지금까지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 시장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던 이유도 기업의 부채와 자산을 연동시켜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조원이 넘는 DB형 시장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통상임금은 물론 저금리 등으로 원금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수익관리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삼성자산운용이 업계 처음으로 DB형 시장에 뛰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자산운용은 20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주요 기관투자가 20여곳을 대상으로 ‘삼성DB통합 솔루션’을 발표했다. 삼성운용은 원리금보장상품으로 포트폴리오가 꾸려져 뚜렷한 성과가 없는 현재의 DB형에 기업부채까지 연동시켜 수익을 제고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1심 판결로 기업들의 DB형 부채가 급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진 상황에서 부채와 연동된 포트폴리오 제공은 퇴직연금사업자를 비롯해 기업들에도 상당한 관심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내 연금시장이 은행·증권·보험업계에 한정된 상황에서 운용사가 퇴직연금 시장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확정기여형(DC형)과 달리 원리금보장상품 일색으로 꾸려져 사실상 방치된 영역인 DB형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삼성운용이 연금시장의 ‘메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삼성운용은 단순 포트폴리오 제공으로 상품을 편입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자산과 부채분석을 통해 재무부담을 예측하고 운용위원회를 설치해 기업이 DB형 퇴직연금 관리 체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아울러 국민연금과 사학연금 등 국내 대표 기관투자가들과 해외 퇴직연금 기관들이 모두 사용하는 투자정책서(IPS·Investment Policy Statement)의 도입을 지원할 예정이다. IPS는 퇴직연금의 운용철학과 운용방법·기대수익률·위험한도 등의 기준을 명시한 ‘약속문서’의 일종이다. 이를 지원해 삼성운용은 퇴직연금 운용의 투명성과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복안이다.
근로자 자신이 수익을 챙기며 운용지시를 내리는 DC형과 달리 DB형은 ‘깜깜이’ 운용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4월 감사원 감사결과 2015년도 DB형 퇴직연금 최소적립금을 채우지 못한 기업이 전체 대상 기업의 50.8%에 이른다. 퇴직금 지급에 필요한 최소금액을 채우지 못한 기업이 절반에 달하지만 운용 상황이 공표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최소적립금의 95%를 채우지 못한 4만6,445곳의 기업 가운데 2,303곳(5.1%)은 재정안정화계획서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기업뿐만 아니라 42곳의 퇴직연금사업자 중 7곳도 근로자 대표에게 최소적립금 비율 미준수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다. 수익률도 미미한 수준이다. 원금손실을 극히 꺼리는 DB형 근로자와 기업들의 수요에 맞춰 95% 이상이 원리금보장상품에 가입돼 있다 보니 지난해 기준 DB형의 수익률은 1.68%에 지나지 않았다. 근로자가 퇴직할 때까지의 물가상승률도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운용이 기업의 장기 퇴직부채와 부담금 예측이 가능한 DB형 솔루션을 시장에 제공할 경우 수요는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년간 DB형 솔루션 개발을 검토한 다른 운용사 관계자는 “기존 퇴직연금사업자인 은행과 증권·보험업계가 지원을 하지 않는 이상 성공하기 어렵다”며 “국내 최대 퇴직연금사업자인 삼성생명과 연계할 경우 삼성운용 DB 솔루션은 빠르게 시장에 안착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방치된 것과 다를 것 없는 DB형 시장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