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에 나뭇잎이 파르르 떨린다. 연둣빛 새순도 짙푸른 초록도 아니건만, 초가을 햇빛은 자꾸만 이파리 하나하나를 건드린다. 작당한 듯 바람이 가세해 단풍 들기 전 마지막 생명력을 과시하라며 잎을 들추고 반짝임을 찾아낸다. 그런 영롱한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농락당한 듯 어지럽다. 그래서 가을을 타나 보다. 어떤 그림은 남의 숨겨둔 감정을 후벼 파듯 끄집어내거나 아픈 자리 다시 꼬집은 것처럼 흠칫하게 만들곤 한다. 반면 슬픔 하나 없이 마냥 기쁘고 행복하게 만드는 그림이 있으니 이대원(1921~2005)의 작품이 그렇다. 외로움을 벗 삼은 가을일지라도 그의 화폭에는 생명력과 풍요로움이 쓸쓸함을 압도한다.
노랗게 물든 산이 가을빛을 발산한다. 이대원의 ‘산’을 보며 서양미술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인상주의 화풍을 감지할 것이다. 강렬한 원색으로 채운 화려한 화면은 야수파를, 특히 짧고 연속적인 붓 터치로 점을 찍어 빛을 표현한 것은 쇠라·시냐크 등의 ‘신인상파’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해외방문의 기회를 가졌고 서유럽 미술관을 남들보다 먼저 다녀온 이대원이 ‘점묘파’라 불리는 신인상주의 미술을 놓쳤을 리 없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그들의 기법을 들여오거나 흉내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했다.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김원룡(1922~1993)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대원 특유의 ‘색과 선의 율동감은 그대로지만 그전의 짧고 힘센 곡선들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고 대신 길게 휘어지는 직선과 모난 산릉들의 새로운 동감이 화면을 주도하는데 이 변화는 동양화적 요소를 수용한 데서 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단색조의 추상화인 ‘모노크롬’이 지배하던 1960년대 화단에서 이대원은 산·들·나무·연못·돌담·과수원 등 자연을 소재로 택해 화려한 색채로 그려냈다.
이대원의 그림이 한국적이라는 사실에 의문이 든다면 조르주 피에르 쇠라의 그 유명한 그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과 비교해 보자. 쇠라는 빛을 분해해 그 원소를 찍듯, 혹은 스프레이로 빛 알갱이를 분사하듯 점을 찍어 모자이크 같은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대원은 삐쭉거리는 짧은 선을 반복적으로 찍어 풍경을 이뤘다. 자유자재로 여기저기로 향하는 선과 점들이 곧 생동감의 근원이 됐다. 그림에 바람이 담기고, 바스라질듯 햇빛의 질감까지 느껴지는 게 이 때문이다. 덕분에 그의 가을 풍경에서는 윤기 자르르 한 자연의 생명력과 단풍의 서걱거림이 공존한다. 그의 붓질에서는 조선 시대 선비 화가의 문기(文氣)가 느껴진다. 영락없는 동양화의 준법이다. 전통 산수화에서는 바위나 산의 표면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여러 붓질 기법을 사용했다. 점처럼 짧은 2~3㎜의 선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16세기 전반의 단선점준을 비롯해 짧은 쌀알 같은 점을 찍어 안개 자욱한 산을 표현한 미점준, 마(麻)의 올을 풀어 늘어놓은 것 같은 짧은 선을 거듭 찍은 피마준, 도끼자국 같은 붓질로 거칠고 강한 기운을 드러낸 부벽준 등이 있는데 이대원의 그림에서도 그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생전의 작가는 “서양화 기법의 2대 원칙으로 명암법과 원근법이 있으나 나 스스로도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싫다”고 했다. 그는 원색에 가까운 색을 사용하되 그림자를 그리지 않았고 점과 선에 의한 색·면의 대비로 형태를 만들었다. 서양식 명암법과 원근법을 깨버리고 수묵화 같은 대담한 구도를 택했다. 화가는 서양화에 동양화 기법을 도입하고자 했던 꿈을 이뤘고, 이를 본 미술평론가 박래경은 “이대원의 그림이 단순한 모티프에서 오는 넓은 공간감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가 조상 때부터 내려받아온 ‘텅 비면서 꽉 찬 특유의 공간감’과 같다”고 했다.
복 많은 화가 이대원은 경기도 문산에서 태어나 서울 누하동에 살며 청운초등학교, 제이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를 다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당시 전국 규모의 미술전에 참가해 상도 숱하게 받았다. 서양화가 도상봉에게서 데생을 배워 미술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바람을 배반하지 못하고 경성제대(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진학에 만족하신 부모님이 허락해 준 덕에 법대생 이대원은 미대생 못지않게 실컷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57년 하버드대 세미나 참석을 계기로 미국 주요 미술관의 작품들을 접한 것이 자극이 됐다. 그때 맺은 인연으로 독일에서 반년 가까이 체류했고 당시 한국인으로는 유례없이 현지에서 세 번이나 전시를 열었다. 타고난 감각이 있었고 견문 확장의 운도 좋았으며 글재주도 뛰어났기에 그는 화단에서 돋보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으로 반도호텔 내에서 운영되던 ‘반도화랑’의 운영도 맡았다. 그때 발굴해 국내는 물론 서양인에게도 소개한 화가가 바로 박수근(1914~1965)이다. 이후 홍익대 교수로 미술대학장, 총장을 거친 이대원은 예술인 최고 명예인 예술원 회원으로, 회장까지 지냈다. 명성에 작품성까지 인정받았고, 화랑가에서는 생존작가 중 가장 그림값 비싼 화가로 통했다. 누구나 그의 그림을 원했으니 지난 2014년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를 위한 미술품 경매를 통해 공개된 이대원의 ‘농원’(낙찰가 6억6,000만원)이 권력자의 집 거실을 독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명성에 비해 이대원의 삶은 강렬한 색채 속에 정제된 고요함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처럼 정갈했다. 젊어서부터 살기 시작한 혜화동 집에서 70년 가까이 살았고, 유명세에 따라붙는 여성편력도 없었으며 60년 해로한 부인과의 사이에 둔 딸 다섯과 화목하게 살았다. 주중에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작업했고 주말에는 꼭 파주 농원에 가 자연을 그렸다. 지금 우리가 보고 즐기는 ‘복숭아밭’ ‘사과나무’ ‘농원’ ‘못’ 등의 대표작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그림에서 전이되는 행복감은 화가가 건네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