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라이프

[휴] 정조의 효심 흐르는 듯...성곽 감싸안은 억새풀 '넘실넘실'

■정조의 효심으로 세운 수원화성

수원화성 서쪽 대문 화서문 따라

서장대 오르자 수원 시내 한눈에

15㎞ 떨어진 화성엔 사도세자 묘

아들 정조 묘도 맞은편 자리잡아

비극의 운명·효심 다시 되새겨

수원화성의 화서문에서 서장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성곽을 감싸고 있는 억새풀들이 보인다.수원화성의 화서문에서 서장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성곽을 감싸고 있는 억새풀들이 보인다.


사람마다 첫손에 꼽는 ‘비극의 역사’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또 다른 이는 나라 잃은 치욕을 먼저 떠올릴 것이고, 인류사 전체로 시야를 넓혀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며 삼가 옷깃을 여미는 이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가장 가슴 아픈 옛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아버지 손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운명이라 답하겠다. 그리고 아들의 명줄을 제 손으로 끊어야만 했던 영조의 숙명이라 말하겠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2015년)’는 이들 부자(父子)의 가혹한 팔자를 ‘나랏일’이 아닌 ‘집안일’로 접근한 덕분에 620만 관객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다. 세상 사람 전부가 부모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누군가의 자식이므로 팔짱 끼고 심드렁하게 ‘사도’를 지켜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절을 내주기 싫다는 듯 마지막 더위가 심술을 부린 가을의 문턱, 영화 ‘사도’가 남긴 여운을 되짚으며 경기도 수원화성을 찾았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에서 명당으로 소문난 화산(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당시 화산에 살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축조를 결심한 성이다.

수원화성의 서쪽 대문인 화서문을 출발점으로 삼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물결처럼 넘실넘실 흐르는 성곽은 아버지의 혼을 위무하려는 정조의 심경을 대변하듯 너른 품으로 도시를 껴안고 있었다. 분홍빛을 머금은 억새 풀들은 성인 남성의 허리춤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빼곡히 자라 성곽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수원화성의 서장대가 늠름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에는 수원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는 방문객들이 보인다.수원화성의 서장대가 늠름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에는 수원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는 방문객들이 보인다.


손으로 땀을 훔치며 돌계단을 한참 오르자 우뚝 솟은 서장대가 어엿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군사 지휘소였던 이곳에서 조선 시대의 장수들은 100리 안쪽의 동정을 훤히 파악했다. 먼 옛날 나라 지키던 장수를 흉내 내듯 일렬횡대로 나란히 선 방문객들이 수원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포루(군사들이 망을 보며 대기하던 장소)를 지난 뒤 샛길을 타고 내려가 화성행궁에 다다랐다. 정문인 신풍루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장락당이 바로 정조의 침소로 사용됐던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수원을 찾을 때마다 이 행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관련기사



그때 정조의 행로 그대로 행궁을 빠져나와 사도세자의 묘(墓)가 있는 경기도 화성으로 향했다. 차로 30분쯤 내달리니 수원에서 15㎞ 남짓 떨어진 목적지에 도착했다.

입구를 통과해 아름드리 우거진 숲을 헤치며 350m 정도를 걸으면 저 멀리 봉긋하게 솟은 융릉이 보인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시신을 함께 모신 합장릉이다. 방문객의 시선으로 융릉 왼쪽에는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이, 오른쪽에는 비문을 보관한 비각이 세워져 있다.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


마침 융릉을 찾은 이날 화성시가 주최한 ‘정조 효(孝) 문화제’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전주 이씨 후손들이 정자각에서 제사를 드리며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살아생전의 바람대로 정조의 묘(건릉)는 저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했다. 후대 사람들은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받들어 융·건릉을 모신 길을 ‘효행로’라 명명했다.

효행로를 뒤로하고 서울로 발길을 돌리며 영조와 사도세자의 구원(舊怨)을 다시 생각했다. 영조는 어릴 적의 총기를 잃고 활쏘기와 무예에 빠져드는 세자가 못마땅했다. 세자는 자신의 욕망과 지향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한 걸음만 바짝 다가가 속내를 들여다보면 만사형통이거늘, 이들 부자는 서로를 이해하는 대신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는 길을 택했다.

영화 ‘사도’의 말미 영조와 세자는 심중(心中)에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세자가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라 울부짖는다.

이에 영조는 이렇게 읊조린다.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얘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멈춰버린 아들의 숨을 확인한 아버지는 그제야 참아왔던 울음을 꺼이꺼이 토해낸다. /글·사진(수원·화성)=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나윤석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