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프리뷰]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낡은 빌라 둘러싼 인간 욕망

적나라한 블랙코미디로 풍자

서울시극단 13~29일 세종문화회관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 “세상이 왜 자꾸 망가지는 건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절망하는 301호 청년 현태(배우 이창훈) /사진제공=서울시극단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 “세상이 왜 자꾸 망가지는 건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절망하는 301호 청년 현태(배우 이창훈) /사진제공=서울시극단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비현실적인 풍경 일색이다. 밤마다, 주말마다 TV 화면 가득 도저히 현실이 되기 어려울 듯한 전원적인 삶, 느린 삶이 채워진다. 삼시 세끼 끼니를 고민하고, 애완견과 뒤엉켜 요가를 하고, 상에 오를 상추를 뜯는 삶. 반복해서 보다 보면 욕망이 똬리를 튼다. 현실의 삶은 경쟁적이고 피로하며 궁박한 탓이다.

서울시극단이 13~29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는 자연과 어우러진 생태적 삶, 조화로운 삶을 풍경화처럼 비추는 요즘 스타일의 판타지물과는 차원이 다른, 적나라한 이야기를 펼친다. 지은 지 20년도 더 된 낡은 빌라를 배경으로 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간 군상을 뒤집어쓴 각각의 캐릭터는 안팎으로 부지런히 싸운다.


그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짓누른다. 상고 졸업 후 전화국을 다니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던 현자(배우 고수희)는 갈 곳 없는 입주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재건축 동의를 받아내면서까지 돈 버는데 혈안이 돼 있다. 현자의 욕망은 그저 낡은 빌라라도 옥상에서 고추를 키우고 싶어하는 광자(배우 문경희)의 욕망과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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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 빌라 신축에 목을 매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현자(배우 고수희)가 “누구 덕에 올림픽하고 누구 덕에 IMF 넘겼는줄 아느냐”며 분노하는 장면. /사진제공=서울시극단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 빌라 신축에 목을 매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현자(배우 고수희)가 “누구 덕에 올림픽하고 누구 덕에 IMF 넘겼는줄 아느냐”며 분노하는 장면. /사진제공=서울시극단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 현태(배우 이창훈, 왼쪽 세번째)와 동교(배우 유성주, 왼쪽 네번째), 그들을 돕는 청년들이 광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빌라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는 장면 /사진제공=서울시극단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 현태(배우 이창훈, 왼쪽 세번째)와 동교(배우 유성주, 왼쪽 네번째), 그들을 돕는 청년들이 광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빌라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는 장면 /사진제공=서울시극단


또 한 명의 욕망하는 인간은 현태(배우 이창훈)다. 힘겹게 맡은 배역에서 예고도 없이 밀려난 영화배우 지망생 현태는 현자에게 고추를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모욕만 당하는 광자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광자를 대신해 현자와 싸우기 시작한다. 그의 욕망은 인간성의 회복으로 가장된 자존감의 회복일뿐이다. 소셜미디어에 현자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고 신상까지 공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여성혐오의 발톱을 드러내면서까지 그는 작은 승리를 욕망했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키려 했다.

현자와 현태의 그악스러움, 그들의 욕망이 닮아있다면 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은 시간강사 아내와 남처럼 살고있는 47세의 백수 동교(배우 유성주)다. 무엇이든 하는 현자나 현태와 달리 동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 대신 소외와 실패가 낳은 상처를 원료로 움직인다. “인간은 왜 그래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당연한 것들에, 도덕과 한참이나 멀어진 규범과 신념에 균열을 일으킨다. 사회의 기준에서 그는 원 밖의 사람이고 부적응자이지만 그는 원 안의 문제를 직시할 줄 아는 인물이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은 “무겁지 않게 만드는데 치중했다”고 했다. 낡은 빌라에 사는 인간 군상과 그들의 일상을 통해 자본주의와 인간 본성의 문제, 도덕과 윤리의 문제 등 거대 담론을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꼽히는 김 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블랙코미디로 빚어내며 완성도를 높였다. 주말 드라마를 보듯 시종일관 맛깔나는 대사와 명연기가 이어지는데 무대 위에 뿌려졌던 온갖 이야기와 논쟁거리들이 순식간에, 그 어떤 과잉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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