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8일 2,000선을 돌파한 코스피지수의 상승세가 무서울 정도다. 10년 주기로 위기 이후 급등세를 보였던 시장은 올 초 6년간의 박스피(박스권 코스피)를 한순간에 깨버렸다. 외국인은 올 들어 6조8,480억원을 순매수하며 지난 9월 말까지 지수를 22.07%나 올렸다.
지수가 급등한 만큼 증시의 기초체력이 튼튼해졌는지는 의문이다. 높은 외국인 의존도, 줄곧 저평가된 시장,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쏠림현상 등이 언제든 우리 증시에도 ‘서든 스톱(sudden stop)’을 불러올 수 있다.
우리 증시에 외국인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이듬해인 1998년 6월 지수는 장중 277포인트까지 추락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증시에서 외국인은 우량주를 거저 주웠다. 때마침 미국에서 시작된 정보기술(IT) 버블은 한국 시장으로도 이어졌고 1999년 87%라는 지수 상승률을 만들어냈다. 외환위기 이후 증시는 외국인투자가라는 새로운 투자주체를 만났고 글로벌 증시에 데뷔했다.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전일 기준 국내 증시의 외국인 비중은 주식 수를 기준으로 12.57%,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34.72%에 달한다. 시총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비중이 더 큰 것은 그만큼 비싼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전체 시총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말 이미 30%를 넘어섰고 2004년 한때 40%를 넘기기도 했다. 증시 ‘대장주’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외국인 보유 비중은 각각 53%, 49%에 달한다.
상장주식의 3분의1을 외국인이 보유하며 외국인투자가의 동향은 전체 시장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외국인 순매수는 곧바로 지수 상승으로 연결된다. 추석 연휴 직후의 증시 상승세 역시 외국인투자가들의 매수가 이끌었다.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외국인투자가 순매수 금액은 1조7,655억원에 달했고 같은 기간 코스피는 1.7% 올랐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과거에도 이 같은 패턴은 반복됐다. IMF 외환위기로 주가가 277포인트까지 떨어진 1998년, 외국인은 9월부터 이듬해인 1999년 4월까지 외국인이 8개월 연속 순매수에 나섰다. 이 기간 코스피의 상승률은 142.5%에 달했다. 2001년, 2003년에도 외국인은 각각 4개월, 17개월간의 연이은 순매수 행보를 보였고 같은 기간 코스피는 각각 39%, 32% 올랐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지난해 12월부터 올 6월까지 이어진 순매수로 7개월 동안 코스피 상승률은 18%로 집계됐다.
외국인투자가가 이처럼 국내 증시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증시 전문가들도 외국인 동향 읽기에 적지 않은 공을 들인다. 올 들어 외국인 매수세가 이어지자 한 증권사에서는 이를 ‘외국인의 따뜻한 손길’로 지칭한 보고서를 낼 정도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이는 그만큼 우리 증시가 취약하다는 의미다. 외국인이 팔기 시작하면 증시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핵 리스크가 불거진 8월11일만 해도 외국인이 2년 만에 최대 규모(6,500억원)의 순매도에 나서며 코스피는 1.7% 급락했다. 신한금융투자는 과거 사례를 통해 외국인이 5거래일 동안 1조원 이상 순매도할 경우 이후 1~2개월간 코스피가 부진한 것으로 분석했다. 물론 해외에서도 외국인 비중이 30%가 넘는 증시는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북한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유독 외국인투자가들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쏠림현상은 외국인이 만들어낸 우리 증시의 약한 고리다. 올해 코스피가 20%나 올랐지만 개인투자자들의 주머니는 가볍다. 안정적인 대형주들의 가격이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올랐기 때문이다. 시가총액 1~100위에 포함되는 대형주는 올 들어 평균 25% 올랐지만 중형주의 상승률은 3.15%에 불과했다. 그나마 소형주는 3% 하락했다. 대형주는 삼성바이오로직스(올 들어 상승률 136%), 삼성전기(102%), 삼성SDI(101%), SK하이닉스(94%) 등을 중심으로 높은 상승률을 보였지만 소형주는 우리들휴브레인(-84%), 한창(-77%), 동국실업(-61%)처럼 주가가 급락한 종목이 수두룩하다. 대형주 상승세가 중소형주로 옮겨가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기관·외국인투자가는 대규모 자금을 주로 대형주에 투자하지만 개미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자금을 덜 비싼 중소형주에 투자하는 경향이 강하다. 최석원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일부 수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증시 양극화가 예년보다 심하다”며 “개인들은 상대적으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중장기적으로 증시 기초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대로 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패턴 개선, 지정학적 리스크를 보완할 수단 마련 등이 필수과제로 꼽힌다. 이형기 금융투자협회 국제조사역은 “한국이 외국인투자가들의 ATM 역할을 하지 않으려면 우선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더라도 외국인들을 안심시킬 만한 자금 풀을 마련해야 하고 이와 함께 기업 이익을 늘리고 지배구조를 개선할 스튜어드십 코드 확대에 주력해야 한다”며 “이 같은 조치를 통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증시에 대한 저평가를 극복하기 위해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지수 편입을 국가 차원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코스피는 여전히 인도네시아·태국 등 일부 신흥국들에 비해서도 저평가된 상태다. 다만 MSCI 선진국지수는 편입에 앞서 24시간 환전이 가능한 역외 원화 시장을 개설해야 한다는 점, 외국인투자등록제도 철폐 등의 걸림돌 때문에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시장에 대한 신뢰도도 높여야 한다. 직접투자의 위험에 간접투자를 권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은 공모펀드를 외면하고 있다. 9월 기준 공모펀드 설정액은 234조4,924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사모펀드 설정액은 같은 기간 277조7,925억원으로 공모펀드보다 4,300억원 더 많다. 지난 5년간 박스피 장세에서 공모펀드들이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하며 투자자들은 지수가 올라도 더 이상 공모펀드를 믿지 못한다. 높은 규제로 고액 자산가들이 자유로운 운용이 가능한 사모펀드로 대부분 빠져나간 것도 영향을 미쳤다.
공모펀드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면 개인투자자들은 계속 직접투자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특히 코스닥에서는 개인투자자 비중이 여전히 압도적이다. 4월부터 이달 12일까지 코스닥 시장에서 개인투자자의 매수 비중은 83%에 달한다. 코스닥 시장의 변동성을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는 셈이다. 이 기간의 코스닥지수 상승률은 7%를 기록했다. 유가증권 시장에서도 같은 기간 개인투자자 비중은 38%로 코스닥보다는 낮았지만 기관·외국인과 비교해 대등한 매수 점유율을 나타냈다.
유승민 삼성증권 연구원은 “한국 주식 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은 직접 주식 매수와 펀드 가입 등 투자는 축소하는 추세”라며 “중장기적으로는 연금과 보험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식을 보유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고 전했다. /유주희·박호현기자 ginge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