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시절부터 세 군데의 자선단체를 후원해온 직장인 A씨. 비록 크지 않은 돈이었지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10년째 후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원금으로 호화생활을 했다는 강력사건의 범죄자와 후원금을 횡령해 개인적으로 써버린 몇몇 단체의 모습을 보고, 후원을 접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에 빠졌다.
#. 국내의 한 비영리단체 후원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B씨는 요즘 매일 걸려오는 기부 철회 방법을 묻는 전화에 곤혹스럽다. 최근 강력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 후원금을 유용해 호화 생활을 즐겼다는 보도와 일부 단체에서 일어났던 후원금 유용 사건 때문이다. 수시로 걸려오는 후원자들의 ‘철회’ 전화를 받고 그들을 설득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수년간 개인계좌로 딸 치료비를 후원받아 호화생활을 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35·구속)으로 인해 기부 제도 전반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커지고 있다. 후원을 받는 방식부터 수혜 정보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가 있지만 기부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같은 부류로 묶여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씨가 후원금을 모집한 방식은 개인 계좌를 통한 직접 모금이었다. 이씨는 2005년부터 희소병 ‘거대백악종’에 걸린 부녀 사연으로 얼굴을 알린 후, 수시로 딸의 치료비가 필요하다며 딸 또는 부인 계좌로 후원을 요청했다. 주로 홈페이지·블로그·SNS 등을 이용했고 일부 방송을 통해 계좌를 공개하며 후원을 받았다.
다양한 통로를 통해 모금한 돈은 고급 승용차를 몰고 값비싼 혈통견을 분양받는 등 이씨의 호화생활을 위해 쓰였다. 현행 기부금품의모집및사용에관한법률은 ‘연간 누계 1,000만원 이상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면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등에 모집 목적, 목표액, 사용계획 및 모집자 정보를 등록해야 한다’(제4조)고 명시하고 있어 이씨와 같은 소액 개인 모집자는 사실상 관리가 전무한 상황이다.
문제는 전체 기부 가운데 개인 직접 기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불신의 불씨가 단체 기부까지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씨의 경우처럼 단체를 통하지 않고 개인에게 직접 기부한 사람은 한 번이라도 기부를 해봤다는 후원자 중 15.4%에 불과하고 나머지 85% 가량의 기부는 단체를 통해 이뤄진다. 이번 이씨의 사건으로 인해 후원에 차질을 빚게 되면 애꿎은 다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기부에 대한 일반인의 의심은 비단 이씨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8월 ‘새희망씨앗’이라는 단체가 결손아동을 위한 기부금을 횡령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이 단체가 모은 기부금은 128억 원이었으나, 실제 불우아동에게 돌아간 돈은 단 2억 원뿐이었다. 한 어린이 구호 단체에 후원 중인 직장인 김혁중(30)씨는 “가끔 뉴스를 통해 후원금을 횡령해 자기들 주머니를 채웠다는 자선단체들을 듣게 되면 내가 왜 후원을 하고 있나 후회가 든다”고 말했다.
운영비, 광고마케팅비 등 기부금 운용 관련 행정비용인 간접비에 대한 일반인의 부정적 인식도 의심을 키우는 데 한몫 했다. 아름다운재단의 기부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기빙코리아 2016’에 따르면 일반인들은 ‘전체 기부금 중 33% 정도가 간접비로 쓰이고 있을 것 같다’며 실무자들이 대답한 평균 21%보다 더 많은 비중이 쓰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기부를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체의 58.6%가 ‘기부 단체의 투명성 강화’라고 답해 기부 단체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을 보여줬다.
우리보다 기부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도 자선 단체의 투명성 문제에 대한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미국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유방암 환자를 돕기 위해 설립된 ‘유방암 소사이어티’라는 단체는 5,200만 달러라는 막대한 기부를 받았지만 실제 환자에게는 단 31만2,000달러만 지급했고 나머지 5,168만8,000달러는 그 사용처도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비케이 안 한국기부문화연구소 소장은 “이 사건 이후 자선단체 안에서는 스스로 바뀌어야 기부 문화가 바뀔 수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며 “대표적인 단체인 ‘적십자’만 해도 ‘우리는 간접비를 17~18%만 사용한다’라는 문구로 광고를 낼 만큼 투명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기부단체 스스로의 자성과 더불어 정부, 미디어 등이 올바른 기부문화 적립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비케이 안 소장은 “‘어금니 아빠’ 사례에서 그가 많은 후원금을 모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체계적이지 못한 기부 시스템과 미디어의 힘이 컸다”며 “기부와 관련된 부처만 해도 수십 군데에 걸쳐있는 정부 내 시스템과 ‘미담’이라는 모습으로 정에 기대 모금을 호소하는 미디어의 현 기부 방식을 개선한다면 보다 현실적인 기부 문화 정착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비슷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부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다투는 ‘낮은 수준’의 기부 문화는 지양해야 한다”며 “성숙한 기부 문화 정착을 위해 기부자, 기부 단체, 정부 등이 긴밀하게 협조해야 하는 시기가 오지 않았나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