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47호선을 따라가다 남양주시 진접지구를 조금 못 미쳐 마을 길로 빠지면 내각리라는 작은 마을에 닿는다. 한적한 마을 길 옆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제법 규모가 큰 두 채의 목조 한옥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에 단 세 명뿐인 ‘대목장(大木匠)’ 중 한 명이자 중요무형문화재 74호인 최기영 대목장이 전통건축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전수관’이다. 전수관 내에 마련된 작업장에서는 아침부터 목수들의 대패질이 한창이었다. 사무실에서 기자를 반갑게 맞은 최 대목장은 “평생 목수로 산 사람에게 무슨 들을 얘기가 있겠느냐”며 웃었다.
대목장은 전통건축에 종사하는 목수 가운데 궁궐이나 사찰·저택의 건축을 담당하는 책임자다. 건축물의 기획·설계·시공은 물론 수하 목수들에 대한 관리 감독까지 전체 공정을 책임지는 장인이다. 규모가 작은 가구나 문갑·궤·책상·장롱 등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소목장과 구별된다. 최 대목장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전통 건축기법을 적용해 옛 건축물을 복원하는 작업에 종사하면서 창의성을 발휘해 건축의 아름다움을 재창조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전통사찰 건축의 일인자다. 봉원사·개운사·관음사·용문사·월정사·청평사·수덕사 등 주요 사찰의 대웅전이나 부속 건축이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이화여대 한옥교사와 남한산성 수어장대 역시 그의 작품이다. 충남 부여에 조성된 백제문화단지 사업의 전통건축을 총지휘한 것도 최 대목장이다.
최 대목장은 스스로 ‘대목장’이나 ‘무형문화재’라는 거창한 수식어보다는 ‘목수’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내가 잘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아니야. 잘할 가능성이 보이니까 문화재로 지정해준 거지. 사실 나이가 70이 넘도록 지금까지 왜 몰랐었나 하는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야.”
충남 예산에서 광복둥이로 태어난 그는 왜 목수의 길을 걷게 됐느냐는 질문에 직설적으로 답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시절에 이유가 뭐 있겠어. 솔직히 먹고 살기 위해서지. 장인정신이니 사명감이니 그런 것은 그냥 하는 말들이야. 그나마 목수로서 조상에게 물려받은 손재주가 있으니 이걸로 먹고살면 배도 나오고 사장도 되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닐 수 있겠다 싶어 시작한 거지.”
그는 다섯 살에 목수였던 친부를 잃고 모친의 재가로 의부 밑에서 자랐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후인데다 집안이 어려워 수덕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졸업이 교육의 끝이었다. 먹고살 궁리를 하던 그는 목수였던 동네 서당 훈장의 큰아들에게 일을 가르쳐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리고 열여섯 살에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스승을 만났다. 당대 최고 도편수인 김덕희 선생이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기술이 전승되는 철저한 도제(徒弟)식이다 보니 그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다. 연장이 없어 선배 목수의 연장을 갈거나 수리하며 쓰는 법을 익혔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자신이 직접 대장간에서 만들어 쓰기도 했다. 배운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밤중에 몰래 숙소를 나와 창경궁과 덕수궁 담장을 수도 없이 넘나들기도 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고 스스로 보고 깨우쳐야 하는데 다른 방법이 어딨겠어. 그렇게라도 해야 했지.”
최 대목장은 목수가 된 후부터 지금까지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똑같이 목수일 하는데 누구는 그냥 평범한 목수에 그치고 어떤 사람은 도편수가 되겠어. 다른 사람이 잘 때 생각하고 도면이라도 그려보는 사람이 도편수가 되는 거야.” 그는 스스로 대목장이 된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통건축에 대해 그는 한마디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다.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간다”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다. 몇 년 전 그가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된 모 증권사 광고의 카피이기도 하다. 그는 원칙에 어긋나면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집을 다 지어놓고도 이음새 하나라도 잘못돼 있으면 기둥을 뽑아버릴 정도다. “소나무는 1,000년을 가. 그 후 목수의 손을 빌려 1,000년을 더 살아. 그래서 소나무의 수명은 2,000년인 거지.”
이름 있는 전통사찰의 해체나 복원치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2001년 국보 15호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해체복원도 그의 손을 통해 이뤄졌다. 1972년 이뤄졌던 해체복원에도 불구하고 처마 부분이 처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다시 한번 해체복원이 이뤄졌다. “나무에 문제가 있었어. 가까운 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대충 썼던 거야. 좋은 나무로 다시 복원하고 나니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백제문화단지’ 전통건축물 사업은 그가 특별히 애착을 가진 프로젝트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진행된 이 사업은 충남 부여군 백제문화단지에 백제 시대 왕궁과 사찰·목탑 등 187동의 전통 건축물을 짓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특히 문화단지 내 능사 5층 목탑은 그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목탑은 못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나무의 이음새와 중력으로만 구조물을 지탱하는 하앙식(下昻式) 공법으로 지어졌다. 하앙식 공법은 1,400년 전 백제 시대의 대표적 건축양식으로 전해졌지만 이전까지는 이 공법으로 목탑을 제대로 재현한 사람이 없었다. “사방 8m에 불과한 땅에 탑을 올려놓았는데 이게 안 넘어가. 내가 지었지만 참 신기해.”
하지만 최근 광화문·숭례문 복원 과정에서 일어났던 전통건축계의 불미스러운 사건 얘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잘못된 욕심이 화를 부른 거지. 정도를 벗어나서는 안 돼. 분수를 지켜야지. 목수는 목수일 뿐이야. 큰 사업을 맡았다고 목수가 정치인이나 공무원 되고 기업인 되는 건 아니야. 그걸 잊은 것 같아.”
그도 솔직히 광화문·숭례문 복원 사업에 욕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개국 당시 축성도감을 맡아 한양성을 축조한 죽정 최유경이 그의 20대조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난들 왜 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어. 하지만 그 분야에서는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분이 맡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기꺼이 양보를 했지. 그런데 결국 일이 그렇게 돼버려서….”
56년 동안 목수의 외길을 걸어온 최 대목장. 한 번쯤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그는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너무 즐겁고 보람되고 좋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내가 20년 전부터 전북대 석좌교수까지 하고 있어. 그래서 난 대통령도 안 부러워.”
그는 어린 시절 공부를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대목장이 된 후 뒤늦게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2002년에는 교육부로부터 학사학위도 받았다.
그는 여전히 앎에 목마르다. “평생을 목수로 살아왔는데 알면 알수록 부족함이 느껴진다”는 그다. 이 때문에 그는 생전에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 황룡사 9층 목탑 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이 목탑은 한 변의 길이가 22.2m, 높이가 80m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경주에 가면 황룡사 9층 목탑 터에 꼭 가봐. 탑 그 자체만이 아니야. 탑의 위치, 방향, 계절의 변화까지 고려해 지었어. 그 자리에 서보는 것만으로 조상들의 목조건축 기술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느낄 수 있을 거야.”
/정두환 논설위원 dhchung@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He is
△1945년 충남 예산 △1961년 목수 입문 △1977년 문화재청 지정 문화재수리기능자 목공 407호 △2000년 8월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인정 △2001년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수석부회장 △2006년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회장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2009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총연합회 회장 △옥관문화훈장·은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