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아는 내용으로 작품을 하는 것은 어렵다. 이미 서사구조가 다 알려져 새로운 반전 등을 첨가하기 어렵고, 기존 작품에서 느껴졌던 감동을 다시 바라는 관객들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오는 25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에서 펼쳐지는 차범석의 희곡 ‘산불’을 원작으로 한 국립창극단의 창극 ‘산불’의 이성열 연출가(55·극단 백수광부 대표)는 “재해석이 아닌 창작”이라는 데 방점을 찍었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P부락, 그 가운데 비교적 널찍한 마당이 있는 양씨의 집 안팎이 무대로 쓰인다”로 시작하는 사실주의 희곡 ‘산불’을 음악극으로 바꾼 건 ‘하나의 실험’이었다는 그를 서울경제신문이 만났다.
이 연출가는 재해석과 창작의 차이에 대해 “희곡 ‘산불’로 연극을 만들었다면 그건 재해석이라 볼 수 있지만, 영화 ‘산불’이나 창극 ‘산불’은 원작을 해체하고 새로 만든 것인 만큼 재해석이라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희극이며 코러스가 많고 우리의 정서와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는 희랍극은 판소리의 울림을 담아내기 적합하지만, 사실주의극은 정밀한 작품이라 해체가 만만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극단 백수광부의 대표인 그는 연출가의 새로운 관점을 삽입하기 위한 원작 ‘해체’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그의 대표작 ‘햄릿아비’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해체해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삽입했다. 이번 창극 ‘산불’에는 어떤 점이 삽입됐을까.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인 전쟁이라는 상황으로 확대 재창조했다”며 “원래 산불이란 작품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남북 이데올로기 속 신음하는 죄 없는 민중을 그린 작품인데, 지금은 냉전이 끝난 만큼 이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를 위해 코러스로 까마귀 떼, 전쟁으로 죽은 피해자의 원혼 등을 추가했고, 주인공 점례의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는 설정을 삽입했다”며 “구성 역시 1965년 점례가 시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지리산 고향으로 돌아온 순간 희곡 ‘산불’을 회상하는 액자식으로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한반도 역시 위기인데 연극을 준비할 게 아니라 생수를 사놔야 하지 않나”며 농을 쳤지만 그 역시 전쟁의 피해자가 될 뻔 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인민군에게 잡혀 총살 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것이다. 그는 “당시 줄이 두 개 있었는데 한쪽 줄에 서 있던 할아버지에게 이장이 ‘영감, 영감은 저기로 가’라 해서 옮겼는데 할아버지께서 원래 서 있던 줄 사람은 전원 총살당했다”며 “사실 우리 세대에게 이런 얘기는 흔하다”고 말했다.
주인공 세 남녀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맞은 인물이다. 빨치산에서 도망쳐 과부촌으로 피신해온 규복을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사월과 점례가 돌보다 사랑이 싹텄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이성열 연출가는 “사실 이런 사랑은 아스팔트에서 핀 꽃과 같다”며 “아스팔트에서 힘들게 싹을 틔웠지만, 그 싹이 제대로 자라겠나. 전쟁 중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사랑이 애틋할수록, 전쟁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며 “두 여자가 한 남자를 공유하는 다소 엽기적인 사랑이지만 그 원인은 전쟁 때문”이라 강조했다.
“춘향전을 보러 가는 건 몰라서 가는 게 아니라 어떻게 새롭게 만들었나, 그리고 동시대를 공유하는 감성을 어떻게 표현했나 궁금해서 간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아는 사실주의 작품 산불이지만, 우리의 가락과 보편적 비극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