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라빠르망(L’appartment)‘은 시네마키드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다. 장면을 조각내 퍼즐 맞추듯 짜낸 구성, 수채화 풍의 색감에는 열광하지만 시종일관 이어지는 엇갈림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긴장, 모호한 결말은 기존의 영화 문법과는 확연하게 달랐던 탓이다.
그런데 공연계 블루칩 고선웅 연출은 오래전 이 영화가 가진 모든 요소에 매혹됐던 모양이다. “영화와는 다른 재미와 미덕”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원작자인 질 미무니 감독을 만나 승낙을 얻었고 지난 18일 LG아트센터에서 외래어 표기법을 꼼꼼하게 지킨 ‘라빠르트망’이라는 제목으로 연극의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사랑에 너무 빠지면 상처를 준다는 생각을 못 해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극 중 알리스의 대사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마저 낼 수밖에 없는 상처를 깊이 있게 파고든다. 약혼녀 뮤리엘(배우 장소연)과의 결혼을 앞두고 홀연히 사라졌던 옛 연인 리자(배우 김주원)의 흔적을 발견한 막스(배우 오지호), 리자 보다 먼저 막스를 발견하고 사랑했기에 둘의 사랑을 엇갈리게 하는 알리스(배우 김소진), 막스의 친구이자 알리스를 사랑한 루시앙(배우 조영규), 시간이 흘러 리자의 연인이 됐지만 리자에게 오기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 다니엘(배우 이정훈)까지 엇갈리는 여섯 남녀의 사랑과 집착이 무대 위에 펼쳐지며 사랑의 본질을 묻는다.
단순하게 꾸민 무대에서 배우의 힘으로 극의 긴장감을 끌고 가던 고 연출의 스타일과 달리 이 작품은 배우와 음악, 몸짓, 조명, 영상, 소품이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미장센이다. 도시인의 일상을 담았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이 단순히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림 속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비췄듯 장면마다 호퍼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듯 완성한 미장센이 대사 없이도 서사와 감정의 흐름이 이어질 수 있게 한다. 여기에 화룡점정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엇갈리는 사랑을 그리듯 회전하는 무대와 배우들의 몸짓이다. 처음 연극무대에 서는 발레리나 김주원은 몸의 언어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줬고 오지호, 김소진 역시 대사와 몸짓, 표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연극 문법을 소화한다. 특히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 속에 만 가지 감정을 담아내는 김소진의 연기 내공이 빛을 발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말부터 춤, 음악, 조명까지 연극에 쓰이는 모든 언어가 총출동하다 보니 일부 장면에서는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무용과 음악이 장황한 영화의 서사를 압축하는 데는 탁월했지만 전반부에서는 스토리에 지나치게 개입한 나머지 관객에게 남겨질 상상의 여지를 축소한다. 다음 달 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