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1급 공직을 끝으로 대기업 고문으로 간 A씨. 새로 취임한 회사 사장과 함께 국세청장을 인사차 방문했다. 비서가 접견실 앞에서 대기하는 두 사람 가운데 그를 청장에게 먼저 안내했다. 10여 분 뒤 비로소 사장이 접견실에 들어갔다. 어찌 된 일인가. 그와 국세청장은 고시 동기로 공직 입문 때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그부터 부른 것은 민간기업에 재취업한 행시 동기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A씨는 10년 가까이 그 회사 고문을 맡았다.
DJ정부 말쯤 그가 들려준 얘기다. “청장의 센스가 대단하더라”며 웃음을 지었지만 전관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듯해 씁쓸했던 기억이 새롭다. 연줄 없는 일반인이라면 어림도 없는 터.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미국에서는 로비스트라고 부른다. 미국 로비스트는 수정헌법의 청원권에 근거해 합법화돼 있다. 사전 등록해야 하고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도 신고해야 한다. 등록 로비스트만도 4만명이 넘는다. 상원과 하원에 이어 제3원으로 불릴 정도로 입법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한다.
호텔 로비를 떠올리는 로비(lobby)는 ‘찾아온 사람을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도 있다. 뭔가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바로 로비스트로 우리나라에서 로비는 원래 의미와 달리 부정청탁의 동의어쯤으로 인식된다. 1970년대 박동선 게이트부터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에 휘둘린 백두사업, 검찰총장 부인 옷 로비 사건에 이르기까지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형 부패 스캔들이 로비의 부정적 이미지를 키웠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전에 등록한 사람만 직원을 만나도록 하는 한국판 로비스트 제도를 시행한다고 한다. 음성적 로비를 양지로 끌어내겠다는 취지다. 대관업무를 맡은 대기업 임직원과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전직 관료 등이 등록 대상이다. 이런 양성화의 필요성이 어디 공정위뿐이랴. 대형 로펌 고문들이 하나같이 권력기관 고위공직자 출신이 아닌가. 공정위만 청렴성을 외치며 생색낼 것도 아니다. 차라리 미국처럼 로비스트를 등록해 합법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관련법 제정안도 국회에 여러 번 올라갔다. 이런 것은 왜 공론화를 못하는지 모르겠다. /권구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