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주주친화 정책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현행 자기주식(자사주)제도가 주주 평등주의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업의 지배주주인 오너가 경영권 보호를 명분으로 자사주를 우호세력에 저가로 파는 사례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제학계와 법조계에서는 국내 경영원 보호 제도가 취약하다 해도 주주 평등주의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행 상법은 이사회 결의만으로 신주발행절차 없이 자사주를 처분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됐던 네이버와 미래에셋대우(006800)가 지난 5월 5,000억원의 자사주 맞교환과 삼성물산(028260)과 제일모직이 2015년 합병을 위해 우호세력인 KCC에 자사주를 매각할 때 모두 이사회가 결정했다.
네이버는 미래에셋대우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상호 지분을 투자했다. 이를 통해 네이버는 미래에셋대우의 지분 7.1%를, 미래에셋대우는 네이버 지분 1.71%를 각각 보유하게 됐다. 네이버는 금융과 인공지능(AI)을 융합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자사주 스와프(교환)를 했다고 밝혔지만 미래에셋이 보유한 네이버 지분 1.71%는 네이버 대주주의 우호지분 역할을 할 수 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4.31%의 지분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 전 의장이 실제로는 지분율 17% 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래에셋대우 입장에서도 자사주 일부를 자본으로 편입해 자기자본을 늘렸고 의결권이 없던 자사주를 네이버가 가져가게 하면서 의결권을 되살렸다. 양사는 주식에 대한 처분제한기간을 설정하고 계약 위반 시 발행회사가 지정하는 자에게 매도할 것을 청구하는 콜옵션을 설정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자사주 스와프를 하며 우호지분 확보를 위해 의결권 행사를 기재할 수는 없지만 콜옵션 조항을 넣어 상대가 우호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때 주식을 매각해버리는 방법은 결국 우호지분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자사주 제도는 2012년 상법개정에서 경영권 방어를 위해 대폭 완화됐다. 과거 자사주 취득을 제한하고 취득해도 일정 기간 안에 처분하되 누구나 살 수 있도록 했지만 상법개정 이후 이사회 의결만으로도 매각이 가능하도록 했다. 차등의결권, 독소조항(포이즌 필) 등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는 국내에서 자사주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재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셈이다. 자사주는 지주회사 전환에서도 마법을 일으킨다. 회사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고 지주사(홀딩스)가 실제 생산시설을 보유한 사업회사를 지배할 경우 의결권이 없던 자사주가 사업회사에서 지주사로 넘어가면서 의결권을 가지게 된다. 지주사는 사업회사에 대해 자사주만큼의 의결권을 보유해 경영권 강화에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올 4월 삼성전자가 지주사 체제 전환 중단과 40조원어치에 달하는 자사주를 소각하겠다고 밝히자 업계에서는 지주사 전환을 포기하고 총수 지배력 강화 시빗거리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로 평가한 것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자사주 규제 완화는 주주 평등주의를 해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사회 의결로만 자사주를 처분하면 기업에는 자금이 들어오지만 새로운 주주와 의결권이 생기기 때문에 기존 주주의 지위가 흐려진다. 일부 기업들은 자사주를 계열사 등에 저가로 판 뒤 편법 승계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영국·독일·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자사주 취득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지만 처분할 때는 일반 신주 발행 때와 같은 주주총회 절차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권 분쟁이 있는 상황에서 자사주를 우호적인 제3 자에게 처분한다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지만 법률 위반은 아니므로 법률상 흠결을 이용할 여지를 주게 된다”고 지적했다. 조성익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자사주 처분을 허용하더라도 지배주주 이익에만 봉사하는 경우는 금융감독원의 감독이나 사외이사, 기관투자가를 통해 관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논의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는 신기술의 도입이나 재무구조 개선 등 회사의 경영상 목적을 제외한 경우에는 자사주 처분 시 신주모집절차를 거치도록 한 상법 개정안을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했으나 1년 가까이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무위 관계자는 “올 1월 재계 의견을 청취해 종합적으로 검토하기로 한 뒤 진척이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