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프로골퍼 이승현(26·NH투자증권)은 늦가을을 참 좋아한다. 지난해 늦가을 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에서 우승, 데뷔 후 처음으로 한 시즌 2승을 올렸다. 이후 대회 중 홀인원을 터뜨려 1억3,000만원 상당의 수입차를 받았고, 왕중왕전 우승으로 5,000만원의 보너스도 챙겼다. 그해 11월 말 이승현은 1억원 이상 기부를 약속한 사람들의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이승현은 올 시즌 우승 없이 시즌 막바지를 맞았다. 특기인 퍼트가 승부처에서 잘 떨어져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기분 좋은 늦가을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승은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말해왔다.
5일 경기 여주의 블루헤런GC(파72)에서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총상금 8억원). ‘만추의 여왕’ 이승현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선두를 지킨 ‘와이어투와이어’로 시즌 첫 승을 거머쥐었다. 버디 6개와 보기 1개로 5타를 줄인 그는 합계 14언더파로 2위 그룹을 무려 9타 차로 따돌렸다. 이 대회 최다 타수 차 우승으로 지난해 서울경제 클래식 이후 1년 만의 우승이자 데뷔 8년차에 통산 6승째다. 메이저 우승은 2013년 KB금융 스타챔피언십 이후 두 번째. 우승상금 1억6,000만원을 보탠 이승현은 시즌 상금을 단숨에 약 5억1,100만원까지 늘렸다. 상금랭킹 13위에서 7위로 껑충 뛴 것이다.
3타 차 단독 선두로 최종 4라운드를 맞을 때까지도 우승 전망은 반반이었다. 어느 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난코스인 데다 마무리가 아쉬웠던 대회가 올 시즌 유독 많았기 때문. 챔피언 조에서 마지막 18홀에 나선 게 여러 번이었지만 올 시즌 최고 성적은 3위다. 3등만 네 번 했다. 지난주 제주에서 열린 서울경제 클래식 때도 역전 우승을 노렸다가 최종 라운드가 강풍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3위에 만족해야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블루헤런의 가장 까다로운 구간 중 하나인 1~3번홀을 보기 1개로 무난하게 넘어간 이승현은 4번홀(파5) 첫 버디로 기세를 올렸다. 무서운 기세의 김민선과는 2~3타 차를 계속 오갔다. 승부는 의외로 빨리 결정 났다. 이승현이 9번홀(파4)에서 어프로치 샷을 잘 붙여 파를 지킨 사이 김민선이 10번홀(파5)에서 티샷 때 아웃오브바운스(OB)를 낸 끝에 더블 보기를 범한 것. 여기서 격차가 4타로 벌어졌고 이승현이 10번홀(파5)에서 5~6m 거리의 버디 퍼트를 꽂아넣으면서 5타 차가 됐다. 주먹을 불끈 쥐는 이승현의 세리머니에서 우승에 대한 확신이 엿보였다.
이때부터 관전 포인트는 2위 싸움으로 옮겨갔다. 이 사이에도 이승현은 차곡차곡 버디를 쌓았다. 가장 어렵다는 15~18번홀에서도 1타를 줄였다. 마지막 18번홀(파5)에서는 ‘퍼트 달인’답게 5m 버디로 팬서비스도 확실하게 선보였다. 5언더파의 최혜진, 이정은, 김민선이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공동 2위로 마쳤다.
한편 한미일 상금 1위의 자존심 대결에서는 KLPGA 투어 상금왕 이정은이 웃었다. 전날까지 선두에 8타나 뒤진 공동 16위였던 이정은은 이날 버디만 4개를 떨어뜨렸다. 지난주 상금왕을 확정한 시즌 MVP(대상) 이정은은 이로써 다승왕(4승)도 확정했다. 시즌 최종전에서 3승의 김지현이나 김해림이 우승해도 이정은은 공동 다승왕을 차지한다. 이정은은 평균타수 1위에도 더 가까이 다가서 4관왕을 눈앞에 뒀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상금 1위이자 세계 2위 박성현은 이븐파 공동 19위에 그쳤지만, 어깨 부상을 입은 세계 1위 유소연이 LPGA 투어 대회에서 공동 33위에 그치면서 세계 1위 등극을 예약했다. 세계랭킹은 6일 공식 발표되는데 박성현은 역대 최초로 신인 세계랭킹 1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성현은 “세계 1위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다. 하지만 아직은 세계 1위라기엔 부족하다”며 “더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상금 1위 김하늘은 2언더파 공동 8위로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