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극단적인 압박 카드로 우리 통상당국을 두드려 결국 개정협상을 받아냈던 과거의 행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세이프가드(safe guard·수입제한조치), 자동차 안전기준 면제쿼터 등의 다양한 협상 카드를 지렛대로 자동차·철강·쌀·쇠고기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화약고’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를 교착상태에 빠뜨린 ‘일몰조항(sunclause)’ 카드가 등장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5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따르면 ITC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삼성의 ‘웨이퍼 레벨 패키징(WLP·Wafer Level Packaging)’ 반도체 기기 및 부품과 해당 반도체가 들어간 제품에 대해 관세법 337조에 근거한 조사를 개시했다.
이번 조사는 미국의 패키징 시스템 전문업체인 테세라사(社)가 자사 특허 2건을 침해했다며 삼성을 제소한 것에 따른 것이다. 테세라는 ITC에 자사 특허를 침해한 삼성 반도체 제품은 물론 반도체를 탑재한 스마트폰·태블릿·랩톱·노트북 등의 수입금지와 판매 중단을 요청했다. ITC는 관세법 337조에 따라 미국 기업이나 개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한 제품의 수입금지를 할 수 있다.
ITC는 또 같은 날 한국산 태양광 전지에 최대 35%의 관세를 부과하는 안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19일에는 워싱턴DC 사무소에서 수입산 세탁기로 인한 자국 사업 피해 구제조치 공청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관계 안팎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세이프가드 발동을 기정사실로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방한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 같은 세이프가드를 지렛대 삼아 제조업 분야에서 개정 협상의 우위를 점하는 발언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지기반인 ‘러스트벨트(rust belt)’의 표밭을 다지고 우리나라의 비관세 장벽을 낮추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철강 분야에서는 원산지 기준을 강화하자는 압박을 가할 가능성도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세탁기랑 태양광 전지는 전초전의 성격이다. 제조업 분야는 대부분 본사가 러스트벨트에 있기 때문에 국내 기업이 청원만 하면 조사 들어가서 웬만한 것은 다 들어주는 그런 상황”이라며 “세이프가드로 관세장벽을 설치해 자국 제조업을 보호하겠다는 걸 직접 얘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제조업 분야의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쌀과 쇠고기 등 농산물 분야를 주요 압박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다. 미국 측은 이미 지난 8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 1차 회의에서 우리 정부에 농산물 분야의 관세 철폐 기한을 앞당길 것을 요구한 바 있다. 현재 한미 FTA 협정상 전체 농산물 1,531개 품목 중에서 관세 철폐 기한이 남아있는 품목은 566개로 37%에 달한다. 쌀의 경우 미국산 쿼터를 도입하라는 요구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특히 쇠고기가 다시 쟁점으로 부상할 수 있다. 쇠고기의 관세 철폐 기한은 협정문이 발효된 2012년을 기점으로 15년이다. 올해로 한미 FTA 협정 발효 5년을 맞은 것을 고려하면 관세 철폐 기한까지 10년이 남은 셈이다. 30개월 이상 된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를 수입하도록 하는 요구가 나올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최 교수는 “30개월 이상의 쇠고기 수입은 미국 업자들의 자율수출규제로 하고 있고 정부가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상황인데 그걸 그냥 종료해버릴 수 있다고 선언할 수 있다”며 “그 밖의 농산물 분야 민감품목의 관세 철폐 기한을 앞당기자는 요구는 제조업 분야 협상 지렛대 차원에서 언급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프타 협상을 교착상태로 몰고 있는 일몰조항도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몰조항은 5년 단위로 협정문을 자동 폐기하고 그때마다 새로운 협상에 들어가자는 내용이다. 우리 측을 개정 협상으로 이끌었던 미국 측의 FTA 폐기 카드도 나프타 협상에서 먼저 등장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통상당국이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정확히 어딜 향하는 것인지를 가리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또 그로 인해 우리가 챙길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아내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트럼프는 한국에서의 자신의 행보가 자국의 지지층에 알려지는 걸 신경 쓰기 때문에 재협상을 통해 잘못된 한미 FTA를 바로잡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재확인할 것”이라며 “트럼프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실익을 챙길 수 있는 방식으로 대응 방안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