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단거리패 소속 배우 이승헌(45·사진)의 작품을 보고 나오는 관객들에겐 공통으로 잔상이 남는다. 눈빛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움직이지 않아도 눈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들이 무대를 넘어 객석으로 전해진다는 것. 그런 그를 좀 더 다양한 무대에서 만나고 싶다는 것은 팬들의 욕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헌은 단 한 번도 연희단거리패 작품 이외의 무대에는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난달 2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한태숙 연출의 연극 ‘1984’는 그의 첫 외도였던 셈이다.
“‘1984’니까요. 고민할 필요도 없었어요. 지금 이 작품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죠.”
이승헌은 이 작품에서 감시국가 오세아니아에서 외부당원으로 기록을 조작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 역을 맡았다. 5일 막이 오르기 전 극장에서 만난 이승헌은 예의 강렬한 눈빛으로 “지금 같이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는 걸까” 하고 대뜸 물었다.
“‘1984’는 감시가 일상화되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더욱 시의성 있는 이야기죠. 수많은 정보에 노출되지만 우리는 진실에 다가서고 있는 걸까요. 가짜뉴스가 여과 없이 쏟아지고, 도덕·정의·의리 따위의 학교에서 배우는 사회적 덕목이 과연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이 현실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옆 동네 사람들조차 몰랐던 당시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태숙 연출은 윈스턴 역할을 캐스팅하면서 제일 먼저 이승헌을 떠올렸다고 한다. 생김새 자체가 책에서 본 조지 오웰 같기도 하고 의지가 강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피폐한 느낌이 상상 속 윈스턴과 어울린다 싶었단다.
한 연출의 생각은 적중했다. 윈스턴을 표현하기 위해 이승헌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
“옛날에 ‘햄릿’ 역을 맡았는데 연습하다가 ‘작은 그릇의 내가 이렇게 큰 그릇의 인물을 연기하는 게 고통스럽다’며 울부짖으며 고통을 호소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윤택 선생(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햄릿은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고 네가 연기하는 그게 햄릿이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배역을 소화할 때 내 안에 그 역할과 유사한 유전자를 꺼내 쓰는 훈련을 했어요. 제가 윈스턴을 잘 소화했다면 제 안에 윈스턴이 있었던 거죠.”
막이 오르고 그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질문이 ‘한 연출과의 호흡’이다. 그에겐 첫 외부작업이기도 하고 한 연출 역시 무대에 오르기 전 꼼꼼한 작품 분석으로 정평이 나 있는 탓이다. 특히 원작을 각색한 이 작품은 ‘미래의 북클럽’에서 ‘1984’를 읽는다는 액자식 구성으로 시점을 뒤흔들었고 ‘1984’를 읽은 이들도 잘 읽지 않는 ‘부록’ 부분 ‘신어의 원리’에서 많은 내용을 가져와 난해한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1984’는 텍스트가 특히 중요하고 장면의 밀도도 커요. 특히 이번에는 원작이 아닌, 영국의 극작가 겸 연출가 로버트 아이크·던컨 맨밀런이 쓰고 2013년 영국 노팅엄 플레이하우스에서 초연한 각색본을 가지고 온 터라 우리 현실에 맞게 윤색하는 과정이 중요했어요. 물론 연희단거리패는 이런 경우에도 바로 대본 들고 스탠딩 연습을 시작하죠. 대본 분석 작업을 이렇게 오래 한 건 처음인데 구체적으로 인물을 구축할 수 있어 좋았어요.”
목숨 걸고 일기를 쓰고 사랑을 나눠야 하는 ‘1984’의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도 이승헌은 연극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어떤 시대가 되도 연극은 예술 장르 중 가장 끝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연극 ‘도솔가’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자기만의 방 속에 국가를 꿈꾼다.’ 요즘 보면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소통하고 대안적 시대를 꿈꾸잖아요. 하지만 세상은 더 야만적이고 잔혹해지고 있죠. 이럴 때 사람들은 방에서 나와 다시 어울리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겁니다. 이럴 때 연극은 제 역할을 할 겁니다.” 명동예술극장 19일까지.
, 사진제공=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