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기획재정부는 지금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증세 논의가 불붙자 증세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는 내부 보고문서를 만들었다. 복지지출에 대해서는 각종 연금과 보험지출의 경우 보험료율을 높이고 기타 복지지출은 세출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기재부의 이런 입장은 1년여 만에 없던 게 돼버렸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법인세·소득세 인상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맞춰 기재부도 내부 방침을 바꿔야만 했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국정감사에서 왜 1년 만에 입장을 바꿨느냐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설명했다.
보수정권에 이어 진보정권이 들어서면서 180도 바뀐 업무를 해야 하는 것은 세제만이 아니다. 동서발전 사장 때 성과연봉제를 도입했던 김용진 기재부 2차관은 새 정부 들어 성과연봉제를 폐기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3조원 규모의 최저임금 지원도 기재부 내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청와대와 여당의 요구에 눌렸다.
탈원전도 마찬가지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탈원전정책 결정과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산업부는 사실상 배제돼 있었다”며 “청와대로 산업부 얘기가 올라가지도 못했고 우리 얘기를 듣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탈원전 추진 과정에서 산업부는 에너지정책 라인 담당자가 모두 바뀌었다. 특히 새 정부 들어서는 산업부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펴왔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위상이 쪼그라들었다. 산업부의 빈자리는 중소벤처기업부가 대신하고 있다. 산업부의 한 서기관은 “예전에는 대한민국의 수출과 산업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일할 맛도 났다”며 “지금은 서기관과 사무관들 사이에서 무엇하러 열심히 일하느냐. 보람이 없다는 얘기가 많다”고 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정한파는 관료들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최근 리튬 같은 광물자원 가격이 급등하고 유가도 상승세지만 실무진은 아예 손을 놓고 있다.
최순실 사태의 여파도 여전하다. 현재 정부는 서비스산업 혁신전략을 추진하고 있는데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이 이용한 맞춤형 의료 같은 분야는 거론조차 안 되고 있다. 시민단체와 이를 의식한 청와대의 역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검찰과 국세청조차 적폐청산에 벌집을 쑤셔놓은 상태”라며 “최근에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다 보니 관료들 사이에서는 앞에서는 따르지만 뒤에서는 책임을 안 지기 위해 상부 지시를 외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할 정도”라고 강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료사회의 이점도 많이 떨어졌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을 관리·감독하는 금융감독원의 ‘넘버2’ 자리인 수석부원장 자리를 고사하는 이가 나타날 정도다.
기재부 엘리트 공무원들의 민간 이직 러시도 이어지고 있다. 전직 고위관료 출신의 한 인사는 “관료를 하다가 민간에서 일한 사람들은 절대 관료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청문회 과정에서 창피를 당하거나 나이가 많아 다시 관료를 하다가 3년 취업제한에 걸리면 금전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새 정부가 관료를 믿지 못하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노무현 정부 때 부동산정책 실패의 원인을 관료들에게서 찾는다는 후문이다.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부처 보고 시 표지 갈이만 많다”며 관료들의 군기를 잡았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관료들을 두고 “일부 경제부처는 아직 정권이 바뀐 것을 모르는 것 같다”는 질책이 쏟아졌다는 게 관료들의 전언이다. 기재부의 반대에도 청와대가 법인세 인상을 밀어붙인 것을 두고는 ‘김동연 패싱’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관료들의 사기저하와 복지부동에 따른 손해는 오롯이 국민들의 몫이다. 관료사회의 보신주의는 더 강해지고 미래 먹거리 발굴이나 과감한 규제 완화 시도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게 일선 공무원들의 얘기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6개월 정도가 지났지만 관료들의 피로감은 어느 때보다 크다”며 “최소한 정권교체로 기존에 하던 것과 100%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자리면 사람을 바꿔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호소했다.
보신주의가 강해지다 보니 정치권과 청와대의 무리한 공약에 발맞추려는 일들도 적지 않다. 주진형 전 더불어민주당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은 파리바게뜨에 5,000명이 넘는 제빵사를 25일 안에 고용하라는 고용노동부의 요구를 두고 “보신주의에 물든 관료가 친노조 성향이 강한 새 정부에 과잉 충성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전직 장관들은 관료들은 대통령이 쓰기 나름이라고 조언했다. 공무원의 특성상 특정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정책을 보고 일한다는 의미다. 전직 장관 출신 인사는 “전 정부에서 일했다고 해서 관료들을 적대시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며 “결국 공무원은 인사권자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세종=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