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11월21일은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날이다. 벌써 20년이 지나 기억에서 멀게 느껴지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나 평자에게는 당시의 위기감이 어제 일처럼 긴박하다. 당시 사정은 이랬다. 한국은 1994년과 1995년 8% 이상의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룬 다음 1996년 들어서는 경기가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은 5.8%의 성장률을 보였고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각각 5%, 3% 이하로 재정은 흑자를 유지하는 등 경제의 기초 여건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1990년대 들어 우리 정부는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금융자유화 조치를 했고 금융 세계화를 위해 금융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해외로부터 막대한 자금의 차입과 유입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재벌의 지나친 차입과 팽창이었다. 특히 (은행을 소유할 수 없었던) 재벌들은 (규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던) 종합금융회사를 소유하고 이를 통해 이자율이 낮은 단기자금을 외국에서 차입했다. 심지어 이자율이 낮은 단기자금을 일본·미국 등에서 차입해 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 등에 이자율이 높은 장기자금으로 대여하는 비정상적인 해외 영업까지 했다. 이 같은 외채 구조는 단기외채를 상환해야 할 경우 장기 투자로부터 원금을 회수해야 하는 치명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정부의 정책이었다. 정부는 단기외채에 대해서는 거의 무제한의 차입을 허용하면서 자본 유입을 통제하기 위해 장기외채에 대해서는 제한을 가했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금융자유화로 자본의 국제 간 이동이 자유로워졌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따라서 외환 유출입에 따른 환율의 자유로운 변동을 허용해야만 수급이 조정되고 외환시장이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대미 환율을 900원 이하로 유지함으로써 외환시장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원화는 국제 투기자금의 투기적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원화가 고평가돼 있는 가운데 우리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몇 가지 충격이 주어졌다. 첫째, 1994년과 1995년 이어진 경상수지 적자가 1996년에는 GDP의 5% 수준에 육박하는 230억달러까지 증가했다. 둘째, 1997년 들어서는 불황으로 재계 순위 14위였던 한보그룹과 기아자동차가 파산하고 30대 재벌 가운데 파산하는 재벌그룹이 잇따랐다. 기업 부도가 확산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도 누적적으로 증가했다. 셋째, 주식 가격은 정점보다 50% 이상 하락했다. 넷째, 1997년 7월2일 태국 밧화의 폭락으로 동남아 국가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투기적 공격에 따라 외환보유액이 고갈되면서 1997년 12월 외환위기가 본격적인 금융위기로 확대됐다. 1997년 말 환율은 거의 두 배로 상승했다. 따라서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의 대외부채 가치가 원화로 두 배 증가했을 뿐 아니라 대출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금융기관들의 순자산이 급속히 줄었다. 1998년 한국의 GDP는 5.7% 감소했고 실업률은 7.5%로 상승했다. 환율의 급격한 상승에 따라 수입 원유와 원자재의 가격 또한 빠르게 상승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 또한 5%에서 10% 가까이로 치솟았다.
IMF는 구제금융 공급 직후 혹독한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경제개혁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토록 혹독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1998년 이후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자금이 유입되고 외채의 만기가 연장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국제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나타냄으로써 외환시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나아가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위기가 수습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위기의 부담은 대부분 서민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자금에 여유가 있고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이나 법인에 이자율과 환율이 두 배로 상승하는 위기는 기회인 것이다. 위기의 경우 구조조정과 해고의 피해 집단은 위기에 대처할 수단이 없는 대중이라는 말이다. 정책을 담당하는 인사들의 책임이 막중한 이유다. 지금 위기는 멀어 보이지만 항상 대비하고 심려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