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신라 원형집수지 중 영남 최대, 부산 배산성에서 확인

부산 최초 목간(木簡) 1점, 국내 최대 죽제(竹製) 발, 돗자리 등 출토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배산성지 집수지 1호(오른쪽)와 2호 전경./사진제공=부산시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배산성지 집수지 1호(오른쪽)와 2호 전경./사진제공=부산시




부산박물관은 문화재조사팀은 연제구청의 의뢰를 받아 지난 4월부터 배산성지 추정 북문지 일원과 지난해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집수지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고 20일 밝혔다. 배산성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는 배산(서봉 254m, 동봉 246m)의 두 봉우리와 7부 능선을 두르는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부산의 중심지가 대부분 조망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부산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이번에 조사된 2기의 집수지(集水址)는 모두 원형으로 3단의 계단식 호안석축(護岸石築·집수지 붕괴방지를 위해 쌓은 석축구조물)으로 둘러져 있다. 집수지의 구조는 기장산성, 거제 둔덕기성, 남해 대국산성, 남해 임진성 등 남해안 일원에서 7세기대 신라가 축조한 산성에서 확인되는 집수지 구조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산성지에서 확인된 2기의 집수지 규모는 국내 원형집수지 중에서도 최대급에 속한다. 1호 집수지의 경우 최상부 제3단 호안석축을 기준으로 직경 9.5m, 깊이 3.2m 규모이며, 2호 집수지의 경우 직경은 13m(굴광 범위 포함 16.5m), 깊이 4.6m에 이른다. 2호 집수지의 경우 지금까지 영남지역에서 확인된 신라산성 집수지 중 최대 규모이며, 국내에서는 충북 청원 양성산성 원형집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문화재조사팀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집수지 축조시 다양한 고대 토목 기술이 적용됐음을 밝혀냈다. 먼저 호안석축은 ‘品’자형쌓기로 정교하게 축조됐는데 이러한 축조수법은 신라 성곽에서 주로 확인되는 방식으로 잔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집수된 물의 유출을 방지하고 벽체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서 호안석축과 굴광 사이를 잡석과 황갈색 점토를 1.5~2m 정도의 너비로 두텁게 다져서 뒷채움했다. 또 집수지는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저수량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 낮은 지대는 성토해 상부 호안석축과 높이를 맞춰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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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집수지는 2호 집수지와는 달리 바닥을 방사선상으로 구획해 판석을 깔았다. 판석 상부에서 출토된 상층유물은 기와와 토기편이 대부분이지만, 목기나 초본류(草本類)도 수습됐다. 그 중에서 바닥층에서 수습한 묵서(墨書)의 목간(木簡) 편은 2글자가 정도만 남아 있는데 부산에서 최초로 출토된 자료로서, 차후 묵서가 판독되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이에도 대나무를 가늘게 엮어서 만든 발은 길이 1.9m, 너비 0.9m, 정도 크기이며, 표면에는 대나무를 엮었던 것으로 보이는 암갈색 유기물이 체크무늬 형상으로 눌러 붙어 있다. 이러한 발은 함께 출토된 새끼줄과 함께 국내에서 출토된 적이 없는 희귀한 유물로 평가된다.

2호 집수지는 바닥을 여러 종류의 점토로 두껍게 층 다짐했는데 점토층에는 상하 2차례에 걸쳐 낙엽을 두껍게 깔고 그 위에 돗자리를 얹어 다지는 부엽공법이 확인됐다. 부엽공법은 고대부터 제방이나 저수지, 성곽 등 구조물의 기초 다짐토 사이에 낙엽이나 편물, 나무껍질 등을 두껍게 깔아 다져 연약 지반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상층의 돗자리는 부분적으로 결실된 것으로 보이나 하층에서 출토된 돗자리는 집수지 전면에 걸쳐 양호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돗자리가 출토된 사례는 국내에서 드문 경우이며, 재료 분석를 통해서 당시 식생복원이나 직조기술 등 관련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1호와 2호 집수지 내부에서는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는 그릇, 항아리 등 생활용 토기 등이 출토됐다. 특히 2호의 경우 집수지 인근의 건물이 일시에 무너진 듯 포개진 토기그릇과 함께 암·수키와 수 백여 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개명했다고 기록된 점을 미뤄보면 배산성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이 7세기대가 중심이기 때문에 동래군이 설치되기 이전인 거칠산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집수지 배후 퇴적층과 주변에서는 7세기 이전의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어 축성시기가 삼국시대로 소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배산성 일대에 대한 연차적인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문화재조사팀은 배산성지 발굴조사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유적 조사 및 정비·복원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21일 11시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학술자문위원회를 배산성 잔뫼정 인근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한다. 발굴조사 성과를 일반 시민과 공유하기 위한 현장설명회도 오는 27일 연다.

/부산=조원진기자 bscity@sedaily.com

조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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