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경복궁에 들렀다가 왕의 집무실로 쓰였던 사정전(思政殿)을 찾았다.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 백성을 굽어살피라는 뜻에서 ‘사정(思政)’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곳이다. 사정전을 살펴보니 어좌 뒤편에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다. 왕이 신하들과 지혜를 모아 정사를 펼쳐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사정전 양쪽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에서는 왕이 대신들과 경연이나 토론을 통해 국가대사를 논의하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다. 대신들이 왕을 알현하기에 앞서 현안을 토론하고 상의하기도 했다니 오늘의 국무회의인 셈이다. 일찍이 왕과 신하들이 격의 없이 머리를 맞대고 국정 방향을 고민했다니 조상들의 지혜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새 정부 출범 이후 6개월이 지났지만 국무회의에서 치열한 토론이 오가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얘기가 많다. 새 정부 1기 내각이 뒤늦게 완성됐다고 하지만 지진이니 수능대책이니 하는 의례적인 소리만 나올 뿐이다. 출범 직후 국무회의는 활발한 토론이 생명이라며 살아 있는 회의를 만들겠다는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듯하다. 게다가 굵직한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장관이 잘 안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간 숱한 정책이 쏟아져나왔지만 결정 주체를 둘러싼 혼선도 여전하다. 정책 기조가 많이 바뀌는데다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다 보니 일선 공무원들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누가 권력의 진짜 핵심인가를 놓고 시중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원전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근로시간 단축 등 국가의 미래가 걸린 사안마다 속도가 너무 빨라 시장의 혼란은 커지고 경제주체들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정치란 국민보다 반 발걸음만 앞서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민이 따라오지 않으면 반걸음 물러서 이해해줄 때까지 설득하고 동의를 얻으면서 다시 반걸음을 앞서가야 한다는 얘기다. 국민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정치적 운신은 이미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거침없이 돌진함으로써 성공하는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지나치게 급진적이라 좌절하기 십상이다”라고도 했다.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DJ의 충고는 자칫 의욕부터 앞세우기 쉬운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이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얼마 전 만난 어느 공공기관장은 요즘 10여년 전의 인사서류까지 샅샅이 뒤지느라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사소한 의심만 가도 퇴사한 임직원들을 일일이 조사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업무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과 시간을 과거의 잘못을 파헤치는 데 투입하다 보니 후유증이 적지 않다고 걱정했다. 최근 공공기관장 인사가 차일피일 늦어지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역대 정부마다 집권 초기에는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도를 넘어 국력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 개혁 강공 드라이브가 독선으로 이어지고 개혁 피로증이 쌓이면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는 걱정이다.
새 정부는 집권 6개월을 맞아 그간의 국정 전반을 되돌아보고 정책의 내용과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행여 불필요한 혼란과 갈등을 초래한 것은 없는지 과연 지속 가능한 경제 정책인지 여부를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러자면 눈앞의 5년은 물론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정교한 국정 로드맵을 만들어가야 한다. 옛말에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했다. 올해 연말에는 이런 건배사를 추천하고 싶다. ‘함께 가면 멀리 간다’고. ssa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