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칼럼] 역사를 바꾸어 버린 재판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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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운과 시대의 흐름을 바꿔 버린 역사에 길이 남을 송사가 있었다. 순흥 안씨와 여산 송씨 가문 간 노비지위확인소송이다. 이 소송의 판결은 병술(1586)년에 내려지지만, 사건의 발단은 무려 120년 전 과거사에서 비롯된다.

안돈후라는 인물은 경진(1460)년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된 후 벼슬이 봉산군수에 이르는데, 당시 양반은 다 첩을 두는 관습에 따라 노비인 중금이라는 여인을 첩으로 맞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미 다른 사내로부터 감정이라는 딸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돈후는 이에 개의치 않고 첩이 데려 온 딸을 잘 보살피고 키워 송씨 사내와 혼인도 시켰다. 가정을 잘 다스린 때문인지 세월이 흘러 안돈후의 아들인 안당의 벼슬은 정승의 반열에 올라 좌의정에 이르렀고, 첩이 데려온 딸인 감정의 아들인 송사련은 주인의 배려로 노비이면서도 글을 익혀 당시 정계의 실력자인 심정, 남곤 등과 교유했다.


그런데 송사련의 글 솜씨가 뛰어나고 정계의 인물과 어울릴수록 그의 가슴속에는 신분에 대한 절망과 그 절망을 극복하고픈 야망이 불타올랐다. 그런데 노비가 출세할 길은 단 하나, 역모를 고변해 공을 세우는 일밖에 없었다. 역모고변에 성공하면 면천은 물론 역모로 몰린 자의 재산과 지위가 모두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송사련은 자신의 똑똑한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모진 마음을 먹고, 신사(1521)년에 안당 및 그 아들들이 집안에서 권전 등과 공모해 충신인 심정, 남곤 등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밀고를 한다.

이 밀고로 좌의정의 자리에 있던 안당은 물론 아들들이 모두 참수형에 처해지는데, 유죄가 인정된 근거는 ‘성이 다르긴 하나 천륜을 아는 자로써 어찌 외할아버지의 자손을 무고하겠느냐’는 추측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송사련은 하루아침에 노비의 신분을 벗고 고위 공직자가 됐고, 그 아들 익필은 학문에 전념해 조선의 제갈공명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 16세기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가 됐다.

그러나 거짓은 영원할 수 없는 법! 45년이 지난 병인(1566)년에 신사무옥의 진상이 밝혀져 억울하게 죽은 안당의 관직이 복권된다. 그런데 이 때 진상이 밝혀진 이유가 참 웃긴다. ‘송사련의 어미인 감정은 안당의 가문과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천륜으로 보더라도 얼마든지 무고할 수 있다’는 추측때문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안당이 복권하게 되자 그의 증손인 안정란은 복수와 빼앗긴 재산탈환을 위해 권력자인 처가의 지원 아래 노비관리관청인 장예원에 노비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의 주장은 송익필이 속한 여산 송씨는 과거 순흥 안씨의 노비였다가 무고로 면천했으므로 주인이 복권한 이상 여산 송씨는 다시 노비로 환천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피고는 서인당의 도움을 받아 ‘노비라도 2대 이상 양역(良役)에 종사한 자손은 노비신분을 면할 수 있다’, ‘노비를 면한지 60년이 지난 자는 도로 환천하지 않는다’는 경국대전의 법규정을 들어 항변했다.


이렇게 원고와 피고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맞선데다 동서붕당이 가세하는 바람에 병인(1566)년에 제기된 소송은 20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만 20년이 되는 병술(1586)년에서야 비로소 순흥 안씨 가문에 승소 판결이 내려져 송익필을 포함한 70여 명이 노비로 떨어진다. 그런데 이 판결은 지난 계미(1583)년에 일어난 니탕개의 난과 이 난을 수습하기 위한 국방강화책의 하나로 이뤄진 대규모 노비쇄환령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고, ‘주인을 무고한 노비를 도덕적으로 용서할 수 없다’는 대의론에 따른 것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서인당이 동인당과의 정쟁에서 밀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증조부와 조부가 벼슬을 맡아 양역에 종사했고, 면천한지 65년이 지난 송익필 형제는 법을 무시한 판결이라며 울부짖었지만, 조선의 제도로는 판결을 시정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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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니 당사자들이 결과에 승복할 리 없었다. 그리고 승복할 수도 없었다. 판결에 승복해 노비가 되려고 안씨 가문의 문턱을 넘는 순간 보복을 당해 뼈도 추리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송익필은 서인당에 속한 벼슬아치들의 비호아래 시골로 도피해 이름을 바꾼 채 훈장 노릇을 하고 살았다. 그러면서 그는 뛰어난 명성과 글재주를 이용해 반전의 기회를 노리는데, 그 기회란 바로 또 다른 역모의 고변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송익필은 드디어 동인당을 상대로 복수의 기회를 잡는데, 이 사건이 바로 기축(1589)년의 옥사이다. 이 옥사는 곧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번져 근 2년에 걸쳐 온 나라를 피바람의 공포속으로 몰아넣었다. 공식기록으로 사형당한 사람이 1,000명이 넘으니, 기록 없이 형장으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백성의 희생도 그렇지만 조선 최초로 백성들의 각성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강운동인 대동계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대륙침략의 야욕에 불타는 일본 군국파들의 망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곧 바로 임진왜란이 터지니, 이로 인한 국가와 민족적 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재판의 존재가치는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갈등을 해소하여 백성을 화합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재판은 본연의 가치에 충실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되레 백성의 억울함을 가중시키거나 더 큰 갈등을 유발하여 백성을 분열시키는 역기능도 많았다. 조선의 완고한 신분차별과 무자비한 연좌제가 공평하고 합리적인 재판을 통해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는 재판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게 만든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를 추구하는 지금의 우리는 과거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났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낯이 간지럽다. 세간에 ‘괘씸죄’, ‘원님재판’, ‘하명사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봤냐’, ‘유전무죄 무전유죄’ 따위로 법을 비아냥거리는 말이 많은 것만 봐도 그렇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의 고소, 고발율은 인구비례로 이웃나라의 100배가 넘는다. 이러한 원인은 사법기관이 실적을 의식해서 고소인의 편에 서서 윽박지르는 수사나 재판으로 일관하면서도 피고소인의 방어권 보장에 인색하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먼저 고소하지 않으면 당한다’는 피해의식이 팽배한 때문이다. ‘열 명의 진범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형사법의 기본원칙은 딴 나라 이야기라 여기고, 거물 하나 잡아들이기 위해 힘 없는 주변인물 여럿을 잡아 족치면서도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억울한 죄인 한 사람의 사회적 해악은 스무 명의 진범을 놓치는 허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그 한이 쌓이면 국가와 민족의 장래가 어두워진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잡히지 않은 진범은 불안과 가책에 떨며 숨을 죽이고 살지만, 억울한 죄인은 세상을 원망하면서 앙갚음할 기회를 두고두고 벼른다. 그리고 그 앙갚음은 세월따라 되풀이 되며, 나중의 궁극적 피해자는 선량한 백성들이다. 인류는 수천년에 걸쳐 수많은 피를 자유의 대가로 치르며, ‘사법적 진실은 오직 적법절차에 따라 얻은 증거라는 좁고 엄한 관문을 통해서만 추구돼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이를 국가가 앞서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귀중한 교훈을 왜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을까?/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조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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