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에 거기에 들르가 복사 잘하는 법 좀 배울 수 있을까예?”
부산의 한 복사기 대리점에 대뜸 걸려온 어느 청년의 전화였다. 침착한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가 배어 있었다.
이른바 ‘3저 호황’으로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던 1986년, 밀려드는 일감으로 기업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일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줄 시간이 없었다. 새내기 직원들은 서류를 복사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복사하려고 대학교까지 졸업했냐며 불평하는 회사 동기들 사이에서 이 청년은 최선을 다했다. 복사용지가 기계의 어느 부분에 끼었는지 곧바로 찾아냈다. 그가 복사를 하면 신속·정확했고 회사에서는 ‘복사왕’으로 불렸다. 묵묵히 주어진 역할에 열정을 쏟던 그는 현재 세계 1위의 공학 소프트웨어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형우 마이다스아이티 대표의 이야기다.
지난 26일 경기 성남시 마이다스아이티 본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이 대표는 “신입사원 때는 내가 맡은 업무가 복사를 하는 일이니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투자”라고 말했다. 복사일을 열심히 하는 그를 눈여겨보고 그 당시 부장은 영어로 쓰인 최신 설계기법 책을 건넸다.
이 대표는 밤을 새우며 책 내용을 하나하나 번역했다. 내용을 공유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전체 직원 앞에서 강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강연 후 해당 설계법을 표준으로 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됐고 2년 만에 팀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업무에서 미국에서 수입한 설계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불편한 것들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마이다스아이티 창업으로도 이어졌다”며 “현재에 몰입해 최선을 다한 순간들이 내게 기회를 가져다줬고 그 기회를 잡아 성공경험을 쌓아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 9월 마이다스아이티를 창업하기 전에는 사업을 해서 성공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던 그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면서 비효율적인 여러 가지 제도와 체계·문화들이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고 느꼈을 뿐이다. 동료들과 고객들이 일할 때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주려고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됐다.
마이다스아이티는 국내 최초로 건설과 기계 분야 공학 소프트웨어를 미국·일본·영국 등 해외에 수출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8개의 해외 현지법인을 두고 110개국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고 있다.
남다른 기술력 덕분에 두바이의 세계 최고 높이 건물인 부르즈할리파와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 세계 문화유산 복원 프로젝트 등에 마이다스아이티의 프로그램이 적용됐다. 인천대교와 인천국제공항 등 국내 대다수 건설구조물과 시설물 설계에도 활용돼 내수 시장 점유율도 99%에 달한다. 지난해 707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했고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32.9% 증가한 41억원을 기록했다.
이 대표가 현재에 충실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크다. 수위 일을 하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봉제공장에서 일하시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간식은 치약이었을 정도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한 치 앞 상황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꿈이나 비전을 가질 수 없었다”며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하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철학은 마이다스아이티의 채용과정에도 드러난다. 학벌이나 자격증 등 지식 수준을 기준으로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다. 현재에 충실한 사람을 뽑는다.
마이다스아이티에서 직접 개발한 통합역량검사 솔루션 ‘inSEED’는 상황을 대하는 지원자의 반응태도를 평가한다. 생물학과 뇌신경과학·심리학에 기반을 둔 성과행동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설계된 ‘inSEED’에는 첨단 분석 알고리즘과 빅데이터 기술이 적용돼 지원자의 긍정성과 열정·성실성 등을 파악해낸다.
그는 “채용을 해보면 학벌이나 자격증 등 정량적 요소가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긍정적인 태도로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열정을 지닌 사람은 전체 지원자 중 10%에 불과하다”며 “지식은 성과를 만드는 재료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inSEED’는 82%의 정확도를 자랑하며 현재 약 200개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다.
마이다스아이티는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가장 입사하고 싶은 중견기업으로 꼽힌다. 올해 상반기 공개채용 입사 경쟁률이 1,000대1을 기록했다. 신입사원 초봉은 4,100만원, 평균 연봉은 6,000만원에 달한다. 마이다스아이티는 직원들에게 맛있는 밥을 주는 회사로도 소문나있다. 5성급 호텔 출신의 주방장이 매일 직원들의 식사를 담당하고 있다. 이 대표의 행복경영 철학이 묻어난다.
마이다스아이티는 임직원 간 신뢰를 쌓는 비결로 ‘4무(無) 경영’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펙주의와 징벌, 직원 간 상대평가 그리고 정년 등 네 가지가 없다. 그는 “직원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징벌하거나 직원 간 상대평가를 철저히 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올라가지 않는다”며 “오히려 회사가 직원들을 아끼고 믿어줄 때 직원들은 신나서 일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올해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AI) 기반 면접 시스템을 도입했다. 마이다스아이티가 직접 개발한 AI 시스템이 심장박동수, 얼굴색과 온도, 혈류의 흐름 등 지원자의 특성을 분석한다. 얼굴에 64개의 포인트를 지정하고 얼굴 표정도 읽어내며 목소리의 높낮이와 크기도 인식한다. 지난 20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일자리위원회가 함께 연 ‘2017 리딩 코리아 잡 페스티벌’ 채용문화 혁신 박람회에서 마이다스아이티의 AI 시스템을 통해 면접 본 구직자들에게 2만2,000건의 잡 매칭을 제공했다.
지금도 이 대표는 마이다스아이티를 어떤 회사로 키워보겠다는 식의 꿈을 꾸지 않는다. 현재의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한 가지 바람은 그가 다녀가는 세상이 그를 통해 조금 더 나아지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그는 “삶에서 터득한 원리가 있다면 ‘성공=자신×환경’이라는 점”이라며 “성공의 기회는 환경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세상이 날 필요로 할 때 내 열정을 다하면 환경이 기회를 만들어낸다”며 “환경을 탓하거나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차곡차곡 모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판교=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