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령 개정안이 27일 국민권익위원회 전원위원회에서 예상과 달리 부결된 것은 여론 저항에 대한 부담, 업종 및 상품 간 형평성, 국회에 해당 법 개정안이 상정돼 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권익위는 지난 8월 말 대통령 업무보고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청탁금지법을 시행한 지 1년이 됐다.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을 다 포함하고 특히 경제적인 효과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해서 대국민 보고를 해달라”는 지시를 받은 후 경제영향 분석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또 이달 말을 목표로 대국민 보고대회를 준비하는 동시에 청탁금지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업종과 종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해 법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존 규정을 완화하는 쪽으로 시행령 개정안 마련 작업을 진행했다. 정부 역시 이낙연 국무총리가 직접 김영란법 손질의 필요성을 수차례 언급하는 등 규정 완화에 힘을 실어줬다. 특히 이 총리는 지난 19일 서울 양재동 농산물 유통 현장을 찾아 “농축수산물 예외 적용에 관한 청탁금지법 시행령 개정을 논의 중”이라며 “늦어도 설 대목에는 농축수산인들이 실감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 시행 불과 1년 만에 손을 대는 데 대한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번 시행령 개정안의 핵심 내용인 농축수산물 선물비 상한액 상향 조정 등은 김영란법으로 소득 감소를 겪고 있는 농수축산업 종사자들의 호소에 따른 것임에도 일반 국민들의 법 감정, 즉 개정 자체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개정 요구가 우후죽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농축수산물 선물액 상향 조정 과정에서도 당초에는 국내산으로만 한정했다가 수입산과 차별이 있을 경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수입산을 추가하기도 했다.
권익위 전원위원회뿐 아니라 이날 국회에서도 같은 맥락의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권익위가 지켜야 할 상한선을 앞장서서 바꾸면 김영란법이 지켜야 할 청렴 사회의 방파제가 무너지는 것”이라며 “권익위가 어떻게 둑이 무너지는 일에 앞장설 수 있느냐.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날을 세웠다. 또 박 의원은 농축수산 종사자와 중소상인과의 형평성 문제도 지적했다.
이 밖에 이번 시행령 개정안이 부결되는 과정에서는 국회에 관련 법 개정안이 상정돼 있다는 점 등도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학영 민주당 의원은 “관련 법안이 국회에 올라와 있어 국회에서 논의해도 될 텐데 굳이 시행령으로 조정하는 게 더 나은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며 “중소기업 상품 등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의 문제도 있는 만큼 국회에서 심도 있게 논의해 결정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 속에 국회 정무위원회는 이날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서 설과 추석 등 명절에 주고받는 선물을 제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정부의 김영란법 손질 움직임과 별도로 국회 차원에서 김영란법의 부정적 영향을 줄이겠다는 취지에서다. 이 개정안은 윤영일 국민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것으로 김영란법 적용 제외 대상을 규정한 8조 3항에 ‘그 밖에 사회상규에 따라 허용되는 금품 등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품목 및 가액 범위 안의 것’을 추가하도록 하고 있다. 또 사회상규에 따라 허용되는 금품의 범위에는 설과 추석 등 명절에 주고받는 선물을 포함시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현재 8조3항에는 ‘그 밖에 다른 법령·기준 또는 사회상규에 따라 허용되는 금품 등’을 제외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회상규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어 명절에 주고받는 농축수산물도 법의 적용을 받아왔다. 대통령령을 통해 사회상규에 따라 허용되는 금품을 보다 구체화하도록 한 개정안이 통과되면 앞으로 명절에 주고받는 농축수산물 선물은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영현·김현상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