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시작과 끝을 사회가 정할 수 있을까. 최근 낙태죄 폐지 운동과 연명의료 중단과 맞물려 종교계에서 생명 경시를 이유로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연명의료 중단논란, 존중받는 죽음 vs 자·타의적 자살=연명의료 중단은 치료 효과는 없이 임종 과정만 늘리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 네 가지 시술을 중단하고 물·영양·산소 등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의료행위만 시행하는 것이다.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또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거나, 환자 가족 2인의 일관된 진술 또는 환자가족 전원의 합의가 필요하다. 향후 연명의료를 중단하겠다고 명시하는 점에서는 유사하나 연명의료계획서는 임종기환자가 의사와 함께 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난 10월23일부터 시행한 연명의료 중단 시범사업으로 이미 7명이 생을 마감했다. 한 달 만에 2,197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등 새로운 임종문화를 열었다는 평도 있으나 막상 임종기에 들어선 환자가 연명의료계획서를 쓴 사례는 11건에 불과했다.
천주교와 개신교계는 이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총무 이동익 신부는 현재 시행되는 연명의료 중단 시범사업에 대해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부는 “현재의 연명의료 중단 과정을 살펴보면 환자 가족의 동의만으로도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데 이는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환자의 동의 없이 연명의료를 중단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연명의료계획서’를 통한 연명의료 중단을 권고하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역시 환자가 아직 어떤 질병에 걸려 어떤 예후를 겪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작성해 감정적으로 서명할 수 있는 만큼, 질병에 걸린 이후 의료인과 함께 쓰는 연명의료계획서가 자신의 예후도 알고 의료진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있어 더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최충하 사무총장 역시 ‘연명의료 중단’ 시범사업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최 사무총장은 “생명경시사상이 사회에 퍼지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생명을 거둬가는 것도 하늘의 뜻인 만큼 한 사람이 연명을 끊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낙태죄 폐지논란, 생명권 vs 성적 자기결정권=최근 청와대 청원과 조국 민정수석의 답변으로 촉발된 낙태죄 폐지 논란도 뜨겁다. 천주교는 낙태죄 폐지 반대에 가장 적극적이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오는 3일부터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인 서명 운동에 들어간다. 주교회의는 홈페이지에 최근 조국 민정수석이 답변한 낙태죄 폐지 청와대 국민청원과 낙태죄 위헌 심사를 언급하며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며 “생명을 위협하고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는 상황에 맞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서명운동을 펼치고자 한다”고 밝혔다. 천주교는 지난 1992년에도 낙태를 허용하는 형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하며 100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다. 이동익 신부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그 배아는 온전한 인격체로의 생명”이라며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여성의 고통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더라도 생명을 죽여도 된다는 당위성이 생기는 것은 절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한 국가의 노력이나 지원 대신 한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단순한 발상이고 어불성설”이라 밝혔다.
개신교 쪽 최충하 사무총장 또한 낙태죄 폐지 운동에 대해 “생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축복인데 인간이 태어나는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생명의 존엄성은 자기결정권보다 더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최 사무총장은 “최근 성폭력 등 특수한 경우를 예로 들며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하기보다는 생명은 고귀하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일부 교단에서는 ‘낙태죄 폐지’ 등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 위한 내부 논의가 진행중이다. 한국기독교여성청년회(YWCA) 관계자는 낙태죄 폐지에 대해 “여성인권과 기독교적 윤리관이 맞부딪히는 만큼 먼저 각 지부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진보 성향의 개신교 단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역시 “기독교 정신에 따라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과 모든 책임이 여성에게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생명은 그 무엇보다 고귀한 것은 맞지만 이에 대해 종단 전체의 의견이 모아진 것은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