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 농림축산검역본부 소속 청원경찰 A씨는 평일 오전6시께 신문 배달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 사무실 30여곳에 들어갈 신문을 분류해 배달한다. 관용차량 열쇠 수납과 유류비 카드 관리도 A씨의 몫이다. 지난 9월에는 뱀이 수시로 출현하는 야산을 외곽 순찰하라는 지시를 받고 사비 8만원을 들여 장비도 샀다. 청원경찰 관계자는 “본업은 보안·경비지만 각종 잡무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며 “노조가 없다 보니 고용주에 개선을 요구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김천경찰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해 검역본부에 시정 조치를 내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회 곳곳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바람이 불고 있지만 1만2,000명에 이르는 청원경찰들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다. 국가공무원과 일반노동자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분 탓에 정규직화 요구는커녕 불합리한 업무지시 등에 저항조차 못 하는 신세다.
청원경찰은 국가기관과 공공단체 등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중요기관이 경비·보안 업무를 필요로 할 때 지방경찰청의 심사와 승인을 받아 채용하는 민간인 경찰이다. 1962년 기존 경찰인력 부족을 보완하고 중요시설 경비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도입됐다.
청원경찰은 청원경찰법 18조에 따라 공무원이 아닌 일반 근로자이지만 복무 및 징계는 공무원법을 적용받는다. 정해진 구역 내에서 사실상 경찰 보안 업무를 담당하지만 해당 사업장이 고용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신분은 일반노동자인 것이다.
청원경찰은 공무원법에 규정된 △비밀유지 △상관 명령 복종 의무 △직장 이탈 불가 △노동운동·집단행위 불가 방침 등을 따라야 한다. ‘노동(근로) 3권’인 단결·교섭·집단행동권에도 제약이 있어 노조를 설립할 수 없다.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규정은 따르게 돼 있지만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업주와 갑을(甲乙)관계에 놓이기 십상이다. 순찰·출입통제·보안이 청원경찰의 업무범위지만 실제로는 주차관리나 주차요금 징수, 출퇴근 차량 관리 등을 떠맡는 일이 많은 이유다.
자칫 고객들과 마찰이 벌어지거나 작은 실수를 하면 사업주는 곧장 외면하거나 고소를 하기도 한다. 실제 보건복지부 오송생명과학단지지원센터 소속 청원경찰 B씨는 최근 센터로부터 형사 고소를 당했다. B씨는 얼마 전 당직 근무 중 휴식을 취할 공간을 찾으려다 방문 손잡이를 고장 냈다. 센터는 “사무실에서 서류를 훔치려 했다”며 B씨를 형사 고소했다. 청주 흥덕 경찰서는 절도죄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지만 공용물품파손죄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사업주가 청원경찰의 근무형태나 휴가 등 취업규칙을 마음대로 바꿔도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김천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지난달 생산성 증대를 이유로 청원경찰 근무형태 변경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기존에 24시간 근무한 뒤 2일 휴무를 보장했지만 앞으로는 2일 휴무 가운데 하루를 연차휴가에서 제하기로 한 것이다. 이곳 청원경찰들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해당한다며 반발했지만 애초 근무형태를 고시한 근로계약서가 없고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노조도 없어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혁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노무사는 “노조가 없다 보니 취업규칙이 변경돼도 청원경찰들이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처지”라며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대응하다 보면 사업주의 회유나 협박에 의해 무너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청원경찰의 근로 3권을 제한한 배경에는 공항 등 주요시설 근무자가 파업하면 국가보안이 위협받는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청원경찰들도 근로 3권을 보장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헌법재판소가 9월 “국가공무원도 아닌 민간인이 단지 시설 보안 때문에 노동권을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며 근로 3권을 전면 제한하는 국가공무원법 제66조 제1항은 위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헌재는 “특수경비원, 교원, 일부 공무원도 단체교섭권을 인정받고 있다”며 “청원경찰들이 청원주와 실질적으로 동등한 지위에서 근로조건을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근로 3권이 일률적으로 부정돼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국회는 내년 12월까지 법안을 수정해야 한다.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청원경찰이 도입된 1960년대에 비해 지금은 이들에 의한 국가시설 보안 요구가 크지 않은 편”이라며 “법 개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시행령·시행규칙 등을 활용해 단결·쟁의와 같은 실질적 교섭 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