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칼럼] 동의보감은 왜 만들어졌나?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서 외국에서도 여러 번 출간됐을뿐만 아니라 간행된 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치료에 참고가 되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날의 의술이 동의보감 보다 못할까? 결코 그럴 리가 없다. 그럼에도 왜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이 빛을 잃지 않을까?

그 비결은 바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는 의학적 전문지식과 함께 고래로 민간에서 전해지는 치료법인 속방(俗方)을 담고 있어 백성들이 흔히 걸리는 질병을 음식이나 값싼 약재로 손쉽게 치료하는 방법이 많다. 오늘날 전문의학서적은 물론 처방전 한 장도 하나같이 갈겨쓴 영어로 작성되는 사정을 보면, 동의보감의 민본주의적 가치는 지금도 단연 돋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중한 책의 진정한 가치를 정작 알지 못한다. 그리고 왜, 어떻게 만들 어졌는지, 그 연유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렇지만 귀중한 문화유산일수록 감동적인 사연과 역사를 갖기 마련이니 동의보감의 탄생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동의보감은 의방유취(醫方類聚)라는 책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의방유취는 과연 어떤 책인가? 의방유취는 1445년 365권의 책으로 편찬됐다가 30년의 수정작업을 거쳐 266권으로 완성된 의학대백과사전이다. 시대를 뛰어 넘어 150종이 넘는 고려와 조선, 명, 몽골의 의학서적을 집대성하여 진단법·처방법·의학일반이론과 함께 95가지 질병의 증상과 처방 등 15세기 세계의학의 진수를 빠짐없이 담았다.


의원으로서 의방유취의 편찬을 주도한 이는 전순의라는 인물인데, 그는 무려 4대(세종, 문종, 단종, 세조)왕의 재임 시 어의로 일했다. 문종이 즉위 2년도 되지 않아 죽었을 때는 ‘종기를 앓는 왕을 음식(꿩고기)으로 독살했다’며 역모죄로 몰리지만, 역모로 모는 의도를 알아차린 수양대군(세조)의 구원으로 목숨을 구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음식은 약과 같다’는 식약동원(食藥同原)의 원리를 절실히 깨닫고, 의방유취의 편찬에 적용했다. 그 때문에 의방유취에는 백성들이 흔히 앓는 질병의 증상과 가난한 백성들에게 유용하고 손쉬운 치료법이 풍부하게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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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방유취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했다. 그러다보니 1592년 전란 때 왜군이 한양에 들어서자마자 맨 먼저 의방유취를 일본으로 빼돌렸고, 이로 인해 150년 이상 뒤졌던 일본의 의학은 성큼 조선을 뒤따라오게 됐다. 그로부터 근 300년의 세월이 흘러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기타무라(喜多村直寬)라는 일본인 의사가 조선에 대한 죄책감과 고마움의 표시로 의방유취 필사본을 조선정부에 기증했다. 그래서 지금 의방유취의 원본은 일본의 궁궐에 있고, 그 필사본만 우리나라에 있다.

왜군을 피해 도망을 갔다 한양으로 돌아온 왕은 의방유취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596년 허준, 정작, 양예수 등의 의원들에게 급히 의방유취를 대신할 의서의 편찬을 명했다. 이 때문에 동의보감은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의 짧은 기간에 25권으로 완성됐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으로 266권의 책이 25권으로 줄었음에도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은 빠짐없이 실리면서 150년의 임상경험까지 보태졌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에게 훨씬 더 간편하고 유용한 책이 된 셈이다. 이를 보면 그 시대 의원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의식은 벼슬아치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동의보감의 모범이 된 의방유취를 알지 못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전란으로 불탄 궁궐을 300년 동안 수리도 못할 정도로 무능한 왕조가 전후복구의 공적을 백성들에게 자랑하는데 걸림돌로 여겨 의방유취의 존재를 감춘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분명히 또 다른 의도도 있었다. 의방유취의 편찬을 주도한 전순의가 근본(애비)도 알 수 없는 노비 출신이기 때문이다.

전순의는 4대 임금의 어의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결코 안주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널리 의술을 펴기 위해 평생을 연구, 노력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일본이 후대 역사의 불명예를 무릅쓰고 도둑질을 감행할 정도로 뛰어난 의서를 만들고, 식약동원이라는 명언을 처음으로 역사에 남겼다. 산가요록(山家要綠)이라는 농서를 지어 세계최초의 온실농법을 민간에 소개하고, 궁궐에서 겨울채소를 재배하는 기적도 일궜다. 그런데 우리는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남긴 조상을 기리기는커녕 생몰연도조차 알 길이 없다. 노비가 똑똑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여기는 양반들이 그에 관한 기록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을 없앤다고 해서 역사로부터 가려지기에는 그 삶의 궤적이 너무 크고 선명하지 않은가?/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조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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