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토요일 자정이 다 된 시간 서울 홍익대 앞.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 둘이 만취해 멱살을 잡으며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옆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상가건물 모퉁이에 기댄 채 소변을 보고 있었다. 주변의 행인들은 이들을 피해 가던 길을 돌아갔다. 또 다른 골목에서는 20대 여성이 구토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바로 옆에서는 취객들이 담배를 피우며 만취한 여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말 분위기로 흥청대는 홍대 골목 곳곳에서는 이러한 광경이 어렵지 않게 목격됐다.
서울 마포경찰서 홍익지구대에 따르면 이날 하루에만도 접수된 주취자 신고 건수가 137건에 이르렀다. 휴일만 되면 길에서 잠을 자거나 쓰러진 취객을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보호하는 게 경찰의 주요 업무다. 한 경찰 관계자는 “연말 휴일에는 홍대·강남역 등 유흥가 지구대와 파출소에서 술 취한 사람들을 보호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며 “경찰차에 태워 이동하거나 파출소에서 보호하는 동안에도 난동을 부리는 취객이 아직 많다”고 전했다.
“속상한 일이 있었겠지. 술이 죄지, 사람 잘못은 아니잖니. 네가 이해해라.”
한혜진(37·가명)씨는 최근 이런 시어머니의 말에 속이 터졌다. 한씨 남편은 연말 가족 모임에서 친지들과 술을 마시다 사소한 일로 남동생과 시비가 붙었다. 다툼은 몸싸움까지 이어졌고 술상이 뒤집히면서 거실은 난장판이 됐다.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했지만 가족 간 사소한 말다툼이라며 돌려보냈다. 시어머니는 이런 난리를 겪고도 아들을 따끔하게 혼내지 않고 오히려 술 탓만 했다. 한씨는 “부모와 형제가 있는 자리에서 사고를 쳤는데도 가족이 감싸고 도는 모습에 좌절감을 느꼈다”며 “술이 깨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오면 미안해하지만 주변에서 이렇게 싸고도니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주에 관대한 한국 특유의 문화로 ‘주폭(酒暴·술 취한 사람의 폭력)’이 근절되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술에 관대한 풍토 때문에 가정에서부터 제대로 된 음주교육이 이뤄지지 않다 보니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검거된 주취자는 연평균 1만명에 이른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2014~2016년)간 검거된 공무집행방해 사범 4만5,011명 가운데 3만2,117명(71.4%)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의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사람 10명 가운데 7명은 술 취한 사람이다. 이들 때문에 경찰이 다치는 사례도 많다. 2015년 전체 경찰 피습사건 402건 중 317건(78.9%)은 주취자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주취자 때문에 공권력이 흔들린다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다.
특히 법적으로 음주가 허용되는 20세를 전후해 대학이나 직장에서 만나는 폭력적 음주문화는 개인의 음주행태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대학의 강압적인 술 권하는 문화는 매년 신학기, 축제 시즌마다 반복되고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3월 서울시내 모 대학에 입학한 17학번 윤모(21)씨는 아직도 신입생 개강파티를 잊지 못한다. 앞자리에 앉은 선배들이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맞힐 때까지 벌칙으로 폭탄주를 먹인 것이다. 당시 개강파티에 함께 참석한 동기들 대부분은 화장실에 가 구토를 하거나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금오공대 총학생회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2박3일)을 위해 소주 7,800병과 맥주 960병을 구매했던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학생 1명당 소주 4~5병씩 마실 분량을 준비한 셈이다. 과도한 대학 내 음주는 사고로도 이어진다. 전남 광주에서는 8월 한 대학 건물에서 학생이 투신해 숨졌다. 당시 투신 학생은 학과사무실에서 밤새 술을 마셨던 것으로 조사됐다. 2월 강원도 고성에서는 서울의 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 참가했던 여대생이 만취 상태에서 엘리베이터에 손가락이 끼어 절단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대한보건협회에 따르면 2006년 이후 10년간 대학생 음주 사망자는 무려 22명에 이른다.
20대 초반에 경험한 음주문화는 직장에서도 이어진다. 회식·워크숍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돼 강압적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 자리가 자주 마련된다.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많이 마시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는 했다. 하지만 회식은 주로 저녁에 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술이 반드시 동반되게 마련이다 보니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난해 한 무역회사 팀장으로 근무하던 A씨는 대표이사 주재 회식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셔 인사불성이 된 뒤 혼자 귀가하다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특히 최근에는 술 취한 상황에서 직장 내 성범죄가 자주 일어난다. 직장 내 성범죄 이슈의 시작점이 됐던 ‘한샘 사건’ 역시 음주 후 발생했다.
가정·대학·회사 등 어디에서도 주폭에 대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별 비판 없이 과거 음주문화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야구장·공원·대학·열차 등 공공장소에서 술을 판매하거나 마시는 행위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문화다. 공공장소에서 음주로 인한 부작용이 속출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태다. 실제 최근 3년간 공공장소에서의 음주소란 행위로 처벌된 사례만도 8만397건에 이른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는 음주문화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주폭을 양산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내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음주 후 소란을 피우면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5만원의 범칙금이 부과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음주 상태에서 공공장소를 활보하는 것 자체로도 처벌받을 수 있고 미국 뉴욕에서는 공공장소에서 개봉한 술병을 들고 다니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 술 취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오히려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장이나 회사·학교 등 사회 전체적으로 술자리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음주 상태에서의 행위에 대해 관대해지는 분위기가 됐다”며 “술자리는 대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문화와 연결돼 술을 자제하기 어렵고 성추행·폭행 등 사고로도 이어지기 쉬운 만큼 술에 관대한 문화는 우리 사회가 바꿔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최성욱·박우인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