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에 살던 친구 J가 최근 급하게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둘째 딸 때문이다. 올해부터 실시되는 외국어고·자율형사립고·국제고와 일반고의 고입 동시모집에 따른 고육지책이다. 혹시 외고에 지원했다 떨어졌을 경우 학교 배정을 염두에 둔 보험용 이사인 셈이다. J 같은 학부모가 많아서일까. 전국 아파트 전셋값이 5년여 만에 처음으로 떨어졌다지만 인기 학군 지역은 여전히 전세 수요가 꾸준하다.
요즘 고3 못지않게 머리를 싸매고 때아닌 눈치 전쟁을 치르는 게 예비 고1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라고 한다. 확 바뀐 것도 아니고 바뀐 듯 만듯 어정쩡한 교육체계 개편 탓이다. 강남 학원들이 만든 예비 고1 대상 강의와 컨설팅에는 불안감에 자녀 손을 잡고 몰려드는 학부모로 문전성시다. 도대체 예비 고1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우선 올해부터 정부가 외국어고·국제고 등 특목고와 자사고의 우선 학생선발을 금지하면서 해당 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혼돈에 빠졌다. 자칫 탈락할 경우 원치 않는 일반고에 강제 배정될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게다가 예비 고1은 교과과정과 수능이 ‘따로국밥’이다. 이들은 지난 2015년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고교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첫 적용대상이다. ‘학생들이 인문사회과학기술에 대한 기초소양을 함양해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창조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 교육과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자’는 것이 개편 취지다.
그런데 정작 이처럼 거창한 목표 아래 창의융합형 교육을 받게 될 학생들이 치를 오는 2021학년도 대입 수능시험 방식은 기존 그대로다. 정부가 절대평가 과목을 확대하고 통합형 교육과정 개편을 반영해 그해부터 적용하기로 했던 수능 개편을 갑자기 1년 연기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예비 고1이 더 우려하는 것은 2022학년도 대입 때는 수능체계가 확 바뀔 예정이어서 자칫 재수라도 하게 되면 대학 문이 바늘구멍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새 정부의 교육 정책에는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드러난다. 특목고·국제고에 대한 신입생 사전선발권을 없앤 것도 그렇거니와 수능에서 절대평가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의 밑바닥에는 이런 정서가 깔려 있다. 그런데 과연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이 문제일까.
4과목 100점을 맞은 A와 4과목 모두 90점을 맞아 겨우 ‘수’에 턱걸이한 B가 있다. 어느 학생이 더 공부를 잘하는지는 명확하지만 절대평가를 해버리면 차이가 감춰진다. 심지어 공부 잘하는 학생이 역차별을 받게 된다.
어차피 수요보다 공급이 많으면 어떤 기준으로든 줄을 세워야 한다. 그나마 가장 공평한 방법이 줄 세우기다. 수능으로 학생들의 실력을 검증할 수 없다면 대학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일부 상위권 대학이 수능 절대평가 과목이 늘면 아예 신입생 전체를 수시전형으로만 선발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목고·국제고가 없어지면 사교육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도 현실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교육은 학부모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 제도가 이리저리 수시로 바뀌고 대학 가는 방법이 복잡해질수록 불안감에 학원 문을 두드리는 학부모는 는다.
우리 교육이 정상궤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내놓은 정상화 대책들은 오히려 우리 교육을 더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제도 몇 개 뜯어고쳐서 왜곡된 교육을 바로잡겠다는 조급증이 엉뚱하게 특정 학생들을 피해자로 만든 셈이다. 정책 입안자들의 겉만 번지르르한 책상머리 정책보다 현장의 작은 변화가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교육을 개혁하고 싶다면 섣불리 무엇을 하기보다 먼저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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