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과학기술계가 뒤숭숭하다. 새해 들어 일부 정부 산하기관과 출연 연구기관에 대한 종합감사가 진행되면서 ‘표적 감사’ 논란이 일고 있다.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번 감사가 종합감사를 실시한 지 3년이 지난 기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기 감사일뿐이라고 선을 긋지만 과학기술계는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특히 감사 대상 기관 중 이전 정권에서 요직을 맡은 인사가 기관장으로 있는 곳이 다수 포함돼 있어 이들의 사퇴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감사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정기 감사에 포함된 한국연구재단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기관장은 지난 정부에서 각각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과기정통부의 설명대로 두 기관은 수조 원에 이르는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을 집행하고 평가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만큼 ‘감사’를 통해 ‘감시’를 받아야 한다. 감사 결과 비위나 문제가 드러나면 제재를 받거나 문제점을 개선해 국가 과학기술정책 추진에 한 치의 허점도 없도록 해야 한다. 기관장의 개인 비위가 있을 경우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지만 연구 지원·평가 과정에서 발생한 사소한 문제를 침소봉대해 조직을 흔들고 기관장 스스로 물러나도록 압박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전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의 옷을 강제로 벗기는 구태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적폐 청산을 내세워 다시 폐단을 쌓는 일이다.
과학기술 분야는 오랜 기간에 걸친 투자가 이뤄져야 성과가 나오는 특성 때문에 해외 선진국의 경우 기관장들이 장기 재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은 1951년 설립 후 총 14명(직무대행 제외)의 이사장이 거쳐 갔다. 평균 임기가 4년이 넘는다. 반면 2009년 설립된 한국연구재단은 벌써 다섯 번째 이사장이 재직하고 있다. 평균 임기가 2년이 채 안 된다. 정권의 코드에 맞춘 조직 운영으로 비판을 받거나 정권이 바뀌면서 사퇴 압박을 받아 스스로 물러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쯤 되면 ‘연구재단 이사장 잔혹사’라고 할 만하다.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송년 기자 간담회에서 “이전 정부에서 임명된 과학기술 분야 기관장의 임기가 남았는데도 강제적으로 그만두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정권의 국정철학을 같이하는지, 경영 역량을 갖췄는지 살펴보겠다”고 덧붙였다. 현 정부의 국정철학과 맞지 않으면 스스로 옷을 벗으라는 얘기다. 과학기술인이라고 왜 정치적 입장이나 야망이 없겠는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정권 코드에 입 맞추는 과학기술인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과학기술에도 정치적 코드를 맞출 것을 강요하는 정권이 아닌가.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 확대로 창의적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정치적 이념이 끼어들 틈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현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도 녹색성장과 창조경제가 사라진 자리에 혁신성장과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라는 슬로건만 바꿔 단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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