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감사하면서 타고 있어요.”
세 번째 올림픽을 맞는 박승희(26·스포츠토토)는 이전 두 번의 올림픽 때와는 목표 자체가 다르다. 지난 2010년 밴쿠버올림픽 동메달 2개, 2014 소치올림픽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자랑하는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는 “성적은 운명에 맡긴다”고 했다. 이전 올림픽에서 쇼트트랙 선수였던 박승희는 평창올림픽에는 스피드스케이팅(빙속) 선수로 나간다. 소치 대회 이후 은퇴를 고민하다 “안방올림픽 참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은퇴를 미뤘고 “어릴 때 신었던 빙속 스케이트를 다시 신어보고 싶어서” 종목을 바꿨다. 평창올림픽 빙속 1,000m 출전권을 따낸 박승희는 한국 빙상 최초로 올림픽 두 종목 출전 기록을 쓰게 됐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도 진기록이다.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서울 한남동에서 만난 박승희는 “진짜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고 했다. “쇼트트랙 때는 사실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었잖아요. 그때는 2·3등 하고도 1등 못 한 게 불만이었어요. 근데 빙속으로 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보니 2·3등도 정말 소중한 건데 그때 왜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후회되더라고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탔으면 즐기면서 운동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박승희는 “종목 전향을 안 했다면 아마 이런 감정들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며 “지금의 경험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배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쇼트트랙과 빙속은 자매 종목 같지만 차이가 크다. 박승희는 “빙판 위에서 한다는 것 말고는 다 다르다”고 했다. 그는 “스케이트도 다르고 날도 완전히 다르고 유니폼부터 경기할 때 느낌까지 다 다르다”고 설명했다. 400m 롱 트랙을 쓰는 빙속은 111.12m 트랙을 여러 번 도는 쇼트트랙과 비교해 선수가 쓰는 근육도 다르다. 짧은 구간을 많이 돌고 원심력의 영향이 큰 쇼트트랙은 주로 몸의 왼쪽에 힘을 줘야 한다. 이 때문에 골반이 한쪽으로 휘어질 정도였다. 박승희는 종목 전향 후 골반교정과 훈련을 병행해야 했다.
박승희는 “쇼트트랙 선수 때는 허리가 아파서 주사를 맞고 경기에 나서기도 했는데 빙속을 하고부터는 허리는 하나도 안 아프고 생전 안 아프던 무릎이 아프다”며 “몸이 너무 커져서 스스로 놀랄 정도”라고 했다. 요즘은 1주일에 세 번씩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는데 120㎏짜리 바벨도 거뜬히 든다. 쇼트트랙 선수 때보다 체중도 5㎏ 늘었다. 가장 큰 변화는 허벅지 둘레. 박승희는 “재보지는 않았지만 사진만 봐도 잘 아실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여자로서 신체의 급격한 변화가 처음에는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근육량이 많아질수록 기록이 좋아지니 만족한다”고 말했다. “체중계에서 그렇게 높은 숫자를 본 건 처음이에요. 사복을 입으면 영 모양이 안 나지만 그래도 잘 타는 게 우선이죠.”
박승희 가족은 잘 알려졌듯 3남매가 다 스케이트 선수로 올림픽을 경험했다. 언니 박승주(빙속)는 소치올림픽 뒤 은퇴했고 남동생 박세영(쇼트트랙)은 평창 대표선발전에서 아깝게 탈락했다. 박승희는 “지난해 10월 빙속 대표선발전 때 ‘가족을 대표해서 나는 꼭 붙어야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박승희의 좌우명은 ‘안 되면 말지’다. 그는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 후회 없이 준비하되 정말 안 되면 다른 것에 도전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입문 3~4년 만에 경기력을 끌어올려야 하니까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크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훈련하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올 시즌 월드컵 성적만 보면 올림픽 메달권과 조금 거리가 있지만 박승희는 “1·2차 월드컵 때는 스케이트 날이 잘 안 맞아 고생했다. 하지만 3·4차 때는 놀랄 만큼 기록이 좋았다”며 “두 번 나가본 결과 ‘올림픽은 아무도 모른다’가 제 결론이다. 경기(2월14일)에 나가기 전까지 제가 또 얼마나 발전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말로 깜짝 메달에 대한 기대도 내비쳤다. 평창올림픽 뒤에는 과거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친분을 쌓은 라미란·김소연·혜리 등과 오랜만의 모임도 잡아놓았다.
박승희는 “긍정적이고 밝은 기운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던 선수, 하고 싶은 것에 망설이지 않고 도전했던 선수로 동료들과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평창올림픽을 끝으로 스케이트를 벗을 계획이라는 그는 “어릴 때부터 확고하게 꿈으로 삼아온 의상디자이너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엄마는 항상 스스로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당장 성과가 나지 않아도 그 일로 행복하면 된다고 저도 생각하거든요. 유학도 고민 중인데 벌써 설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