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의 ‘다문화’라는 표현은 가치 중립적이다. 하지만 초등학생 사이에서 이 말은 멸칭이다. “야 다문화!”라고 불리는 순간 그 어린이는 험난한 학교생활을 각오해야 한다. ‘흑형’ 역시 마찬가지다. 이 단어는 일부 흑인 남성들이 예체능 분야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생긴 신조어였다. 당시 우리 사회는 ‘흑형’이라는 표현에 비하의 의미가 없으니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틀렸다. 회식에 참석한 여성 직원에게 ‘꽃이 있으니 분위기가 사네’라고 발언하는 것이 여성혐오인 것처럼, 약자·소수자의 속성을 콕 집어 분류하는 그 자체가 혐오였다. 모델 한현민(16·사진) 역시 이 표현에 대해 “그 억양이나 어감이 정말 기분 나쁜데 이를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털어놓았다.
“흑인을 통틀어서 장난식으로 비꼬며 말하는 ‘흑형’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물론 사람들이 악의없이 부르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막상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비하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없어요. 직접적으로 비하하는 말은 아니지만 돌려서 (자신을) 공격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전 세계 영향력 있는 10대 30인에 영국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의 아들 브루클린 베컴, 할리우드 배우 윌 스미스의 두 아들 제이든·윌로 스미스와 함께 선정된 한현민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타임이 ‘인종차별을 이겨내고 한국의 미를 넓히고 있다’고 평한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종 한국인이다. 19세가 되는 2년 뒤에는 징병검사를 받으며 그 결과에 따라 병역의 의무도 수행할 것이다.
그는 최근 한복홍보대사로 선정돼 지난해 12월31일 자정에는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2017 제야의 종’ 타종행사에 한복을 입고 시민대표로 참석했다. ‘한복개발 프로젝트 살롱패션쇼’ 런웨이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순댓국과 간장게장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하고 신기해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사실 그 역시도 자신이 한복홍보대사가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제가 어떻게 한복홍보대사를 하지’라 생각하며 어리둥절했어요. 무의식중에 제가 한복과 거리가 정말 멀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한복과 잘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았고 한복을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어요. 오히려 한국의 더 유명한 모델들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입어보니 통이 커서 편하기도 하고 질감도 곱고 현대적이라 저와 잘 어울린다고 느꼈어요.”
한현민 또한 다른 어린이들처럼 일곱 살 때부터 한복을 입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다른 어린이들과 달랐다. 친구들은 그를 ‘마이콜’이라 놀렸고 친구들의 부모는 그의 외모를 보고 친구에게 ‘함께 놀지 마라’고 타일렀다. 그는 “그나마 (외국인과 다문화가정이 많은) 이태원에 살아서 다행이지 다른 동네 살았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며 “또 어릴 때부터 워낙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많이 듣다 보니 지금은 무덤덤해진 것도 있다”고 밝혔다.
“제가 FC서울 유스인 오산중학교 출신인데 가끔 반 대항 축구대회를 하거든요. 반마다 선수 출신이 두 명씩 있는데 저희 반만 한 명이 축구선수를 포기하고 전학 가서 한 명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다른 반에 기죽지 않으려고 ‘우리는 용병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뭐 ‘내가 오산중 포그바(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기니계 프랑스인 축구선수)야’라고 자랑했어요. 화가 나지 않았느냐고요. 친구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랬겠어요. 친하니까 그러려니 하지요.”
그가 처음부터 모델을 꿈꿨던 것은 아니다. 또래보다 키가 컸던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부 활동을 했다. 투수와 삼루수를 맡았다. 하지만 5남매의 맏이인 그를 운동선수로 키우기에는 그의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 즈음해서 야구부 활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야구를 참 좋아했다”면서도 “장비도 비쌌고 훈련 한 번 하러 가려면 70만원이 넘게 드는 야구부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선택은 그에게 또 다른 길을 열어줬다.
“운동을 그만둔 후 그냥 공고 가서 기술 배워서 취직하려고 했어요. 공부는 정말 못했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입학 이후 모델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패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모델을 하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쉽게 모델이 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사실 패션계에서 인종차별은 만연하다. 세계적인 모델 ‘혜박’도 해외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 처음 활동하던 시절에는 촬영장에서 인종차별을 당했을 정도다. 흑인 혼혈 모델에 대한 편견은 굳건했고 심지어 해외 캐스팅 오디션에 나가게 해주겠다는 사기꾼의 말에 속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30만원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됐다. 그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남은 사진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는데 현 소속사인 에스에프모델스의 윤범 대표가 연락을 해왔다.
“대표님이 바로 만나자고 하셔서 이태원에서 만났는데 한 번 걸어보라 하고는 바로 ‘너를 꼭 쇼에 세워줄 테니 나랑 같이 일하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진짜 2주 만에 한상혁 디자이너의 에이치에스에이치(Heich Es Heich)쇼의 오프닝으로 데뷔했어요.”
데뷔한 지 2년도 안됐지만 그는 모델계의 샛별이 됐다. 190㎝의 훤칠한 키, 긴 다리와 팔,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대비되는 앳된 얼굴은 그만의 장점이다. 기세를 몰아 예능에도 진출했다. 세계 진출을 위해 부족했던 영어를 배우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디셈버’를 12월 대신 ‘가수 아니냐’고 반문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줬다. 거침없는 입담으로 팬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카메라와 런웨이 밖에서 그는 영락없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다. 온라인 축구 게임 ‘피파 온라인’을 “우리 동네 보광동에서 제일 잘한다”고 자랑하고 “PC방을 하도 자주 가서 사장님과 호형호제한다”고 밝힐 때는 더더욱 그렇다. 영어는 못해도 급식체(중·고등학생의 신조어 말투)는 유창하다. 웃으며 “PC방에 워낙 자주 가서 공부를 못했던 것 같다”고 고백할 때는 나이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런 그도 꿈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면 저와 같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어요. 아직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사소하더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고 싶어요. 가끔 인터넷으로 인종차별적인 악성 댓글을 접할 때는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재단 만들 때는 더 많이 바뀌어 있을 거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