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Me Too'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작가

'미투 운동' 핵심은 연대와 공감

'나도 당했다' 번역, 본질 왜곡시켜

여성 향한 모든 종류 폭력에 맞서

남성도 '진정한 동지'로 만들어야

정여울 작가정여울 작가


타인의 슬픔에 격한 공감을 표현하는 언어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상처의 흔적들이 기입되어 있다. 당신이 아프니 나 또한 아프다는 것, 당신이 지금 느끼는 슬픔이 내가 과거에 느꼈던 슬픔과 똑같다는 것을 표현하는 따스한 공감의 언어가 바로 ‘미 투(Me, too.)’다. ‘미 투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뒤, 내 마음 속에는 이제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수많은 상처의 역사들이 수천 개의 블록으로 이루어진 도미노처럼 와르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추며 ‘아스케키’라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던 남자아이들, ‘아스케키’가 너무 싫어서 바지를 입고 나가면 바지마저 벗겨버리고 깔깔거리며 박수를 쳐대는 남자아이들의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하철에서 잠깐만 졸아도 어느새 몸을 더듬던 옆자리 남성의 음흉한 손길, 매트에서 ‘앞구르기’를 가르친답시고 대놓고 모든 여자아이들의 엉덩이를 차례차례 만지던 체육 선생님, 문제풀이를 도와준답시고 여학생들의 귓불이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치근대던 수학선생님, 세미나 뒤풀이를 한답시고 노래방에 가서 여학생들에게 ‘블루스’를 추자며 끈적끈적한 눈길을 보내던 교수님과 선배들. 한 편의 글에 나열하기도 벅찬 그 수많은 악몽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미, 투(Me, too)’라는 두 단어와 함께.



이제 와서 상처를 치유할 수도 없고, 뒤늦게 복수를 할 수도 없으니, 이제는 차라리 잊어야지, 곱씹어 생각하면 나만 손해지, 내가 운이 나빴던 거야,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포기시키며 그저 꼭꼭 감춰두기만 했던 수많은 상처들이 ‘미, 투’라는 마법의 주문과 함께 불려나와 일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이 운동을 ‘나도 당신의 슬픔과 분노에 공감합니다’라는 뉘앙스로 이해했다. 미투라는 고백에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의미도 있지만 ‘당신 혼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당신의 싸움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느낌이 더 강하다. ‘당신은 피해자일 뿐,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아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런데 얼마 후 ‘미투’를 ‘나도 당했다’로 번역하는 기사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미투’를 ‘나도 당했다’라고 규정해버리면, 그것은 미투 운동의 진정한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당했다’라는 번역에는 피해자의 억울함, 가해자의 악행에 대한 폭로의 의미가 더 강하게 묻어 있다. ‘나 또한 당신의 아픔에 공감합니다’라는 느낌을 통해, 숨죽이고 있는 다수의 피해자들에게 강한 연대를 호소하는 설득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미투의 핵심은 ‘공격적 폭로’가 아니라 ‘연대와 공감’의 표현이다. 가해자를 사회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린 아이들부터 철저히 성교육을 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성교육의 내용에는 ‘이성과의 모든 접촉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강박관념이 아니라 ‘모든 사랑의 표현에는 본질적으로 존중과 배려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더 깊은 공감의 메시지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미투 운동은 단순한 폭로와 고발에 그쳐서는 안 된다. 미투는 궁극적으로 더 용감한 행동, 더 따스한 공감, 더 적극적인 치유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남성 대 여성의 싸움이 아니다. 폭력과 편법을 써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vs 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굴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다. 미 투 운동을 벌여서라도 여성을 향한 모든 폭력과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의 진짜 의도는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조차도 ‘미래의 진정한 동지’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저항할수록, 세상은 분명 더 좋아진다. 미투는 멈출 수 없는 저항의 불길이다. 아무리 피해 여성을 음해해도, 아무리 잔인하고 비겁한 악성댓글로 여성의 자존감을 위협해도, 미투 운동을 상징하는 흰 장미의 물결은 점점 더 확산될 것이다. 당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견뎌온 모든 착취와 폭력과 부당함이 끝날 때까지. 당신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합리화해온 모든 막말과 성희롱과 성폭력이 끝날 때까지. 미투, 그 단순하면서도 마법 같은 공감과 연대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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