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비행으로 극에 달한 피로를 한 번에 날려준 건 처음 보는 커다란 하늘과 바다였다. 한국에서도 매일 보는 하늘이었지만 고층 건물과 산이 없는 커다란 하늘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하늘색 도화지에 흰 붓으로 터치한 듯한 하늘과 그 하늘색을 닮은 바다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남극이 코 앞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입(入)남극을 위한 험난한 여정은 다시 시작됐다. 극지 전문 민항기인 ‘DAP’를 타고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인 드레이크 해협 상공을 지났다. 2시간을 날아가자 창밖으로 거대한 빙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극 대륙 위를 수만년간 덮고 있는 빙벽들은 ‘이곳이 지구의 남쪽 끝’이라며 손짓했다. 안개가 자욱해 비행기가 한 번에 착륙하지 못하고 오르내리길 수차례, 드디어 남극 킹조지섬에 안착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착륙하지 못하고 다시 푼타아레나스로 돌아가기도 한단다.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땅, 남극 킹조지섬에 첫 발을 내딛는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는 너나없이 환한 미소로 사진을 남겼다. 현재 남극은 여름인지라 온도는 영상 1℃라고 했다. 하지만 초속 4~5m/s의 남극의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칠레 프레이기지 활주로에서 빠져나와 세종과학기지로 들어가기 위해 ‘조디악’이라고 불리는 고무보트를 탔다. 이미 두꺼운 겨울 파카를 입어 몸이 둔했지만 그 위에 또 전신 구명복을 입고 조디악에 올랐다. 세종기지까지 가는 20분, 조디악을 타고 둘러본 남극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남극 대륙 끝자락의 소만마다 얼음이 된 눈들 모여 절경을 이뤘고, 기지 앞바다에는 지구온난화의 흔적들인 거대 유빙들이 떠다녔다. 어디에 눈을 둘지 모르고 남극을 감상하다 보니 저 멀리 주황색 건물들이 모인 세종과학기지가 보였다. 굉음을 내던 조디악의 엔진 소리가 잦아들었고 조디악은 기지 부두에 입항했다.
정부 조사단과 취재진을 맞으려 많은 기지 대원들이 나와 있었다. 대원들은 1만7,240km 떨어진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았다. 조디악에서 내려 부두 위 기지로 올라서자 2004년 조난당한 동료를 구조하기 위해 출동했다 희생된 고(故) 전재규 대원의 동상이 가장 처음 눈에 들어왔다. 고(故) 전재규 대원의 묵묵한 얼굴에서 극지 생활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기지 아래 해변에서는 젠투 펭귄 한 마리가 자신이 남극을 소개라도 하는 양 물끄러미 사람들을 응시했다.
◇‘지구온난화 현장’...녹아 내리는 빙벽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머무르면서 가장 처음 찾은 곳은 기지 남서쪽에 바로 자리 잡고 있는 마리안 소만이었다. 이곳은 빙하가 점차 후퇴하고 있는 지역이다. 칠레 공군 헬기를 타고 내려다 본 마리안 소만 곳곳에는 빙하 안에 감춰져 있던 산악지형이 관찰됐다. 취재진이 세종기지에 머물렀던 지난 1월24일부터 31일까지의 기간 동안 마리안 소만에서 떨어져 나온 엄청난 양의 유빙들이 해안가로 몰려들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강설량과 온난화가 지속된다면 마리안 소만의 빙하 후퇴는 점점 가속화돼 2060년이면 빙하를 관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남극 하계 연구를 위해 기지에 머물고 있는 이홍금 전 극지연구소장은 “빙하가 무너질 때 ‘우르르 쾅쾅’ 하며 세종 기지까지 천둥치는 소리가 난다”며 “남극의 여름 내내 빙하가 깨지고 있고, 기지까지 내려온 유빙 가까이 가보면 눈이 쌓여 만들어진 얼음이라 그 안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톡톡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설명했다.
세종과학기지에서 조디악을 타고 북동쪽으로 20분, 다시 30분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포터 소만에서도 지구온난화의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됐다. 빙벽을 100여미터 남겨둔 곳에서는 남방큰재갈매기 30~40쌍이 ‘끼룩끼룩’대며 주위를 맴돌았다. 이 남방큰재갈매기가 포터소만 인근에 살게 된 이유는 바로 따뜻해진 날씨 때문이다. 현장을 동행한 홍순규 세종과학기지대장은 “빙하 앞을 보면 지형이 울룩불룩한데 빙하가 녹으면서 빙퇴석을 끌고 내려와서 놓고 간 것”이라며 “빙퇴석 지형이 드러나면서 남방큰재갈메기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생태환경도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남방큰재갈메기의 둥지가 있는 지역은 과거엔 빙하가 덮여 있었고 연구자들이 매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빙하가 사라졌다고 한다”고 귀띔했다.
◇혹한의 추위에도 살아남는 놀라운 생태 현장
겨울이 되면 영하 30~40℃는 거뜬히 내려간다는 남극. 이 극한의 추위를 이기고 남극에 터를 잡고 사는 동식물들도 있다.
가장 유명한 동물로는 펭귄이 있다. 지난 1월25일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남동쪽으로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1시간을 걸어 ‘펭귄 마을’로 유명한 ‘남극특별보호구역 171번(ASPA No.171 Narebski Point)’을 찾았다.
마을을 이룬 펭귄들의 생태 현장은 경이로웠다. 수천 마리의 젠투펭귄과 턱끈펭귄들이 옹기종기 모여 8~9m/s로 부는 빙원의 바람을 서로 막아주는 모습이 짠하면서 기특했다. 짝이 없는 펭귄들은 바람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 있었다. 털이 난 방향과 바람의 방향을 맞춰야 그나마 덜 춥기 때문이란다.
젠투펭귄과 턱끈펭귄들이 해안가 위의 바람이 많이 부는 고지대에서 번식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홍순규 남극 세종과학기지 대장은 “바람이 강하게 불어야 눈이 쓸려나가고 그래야 둥지에 물기가 없어 알이 잘 부화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알을 품고 있을 때는 바람의 방향과 반대로 누워 있더라도 새끼를 지키기 위해 극한의 추위를 견디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펭귄 마을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불과 몇 주 전 알에서 부화한 새끼 펭귄들이 어미의 목을 쪼아 먹이를 받아먹는 장면도 포착됐다. 새끼가 어미의 목을 쪼아야 어미가 먹었던 크릴새우를 토해낼 수 있다고 한다.
한 편에는 새끼 펭귄들이 수영 연습을 하는 ‘펭귄 유치원’도 자리 잡고 있다. 아직 솜털이 빠지지 않아 바다로는 나갈 수 없는 새끼 펭귄들은 자그마한 물웅덩이에 모여 수영하고 그 모습을 서로 지켜봤다. 이따금 펭귄들의 천적인 남극도둑갈매기가 주위를 돌다 새끼들 곁에 내려앉았다. 보통 펭귄들의 알을 쪼아 먹는 남극도둑갈매기는 이미 다 부화한 새끼들과 거리를 두며 멋쩍어했다. 펭귄들도 경계는 하면서도 큰 움직임은 없었다.
해안가가 보이는 절벽 끝에 도착하자 수천 마리의 턱끈펭귄들이 군집을 이루며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해안가에서 돌아오는 어미를 기다리는 듯했다. 어미 펭귄들은 새끼 펭귄들을 돌보며 ‘끼룩끼룩’ 울었다.
펭귄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기지로 돌아가는 길에는 큰풀마갈매기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도 포착됐다. 그 옆을 조심스럽게 지나가는데큰풀마갈매기는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며 경계할 뿐 알 곁을 떠나지 않았다. 기지에 거의 도착하자 웨델해표 한 마리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취재·연구진의 눈 밟는 소리에 놀랐는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이내 다시 낮잠을 청했다.
혹한의 남극에서 사는 식물로는 ‘땅의 옷’이라는 뜻을 가진 지의류가 대표적이다. 기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끼처럼 보이는 생물이 가득 붙은 커다란 바위가 많은데 여기 붙은 생물들이 모두 지의류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연구진은 남극 지의류의 한 종류인 라말리나 테레브라타에서 기존 물질보다 항산화 성질이 월등히 뛰어난 새로운 구조의 화합물인 ‘라말린’을 분리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라말린은 기존에 시판돼온 합성 항산화제인 비타민C보다 50배 이상 되는 매우 높은 항산화 효과를 내 산화 관련 질병 치료제나 노화방지용 기능성 식품, 주름개선용 화장품 등에 활용될 수 있다. 실제로 2011년 LG생활건강이 이 라말린을 활용해 ‘프로스틴’이라는 화장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홍 대장은 “지의류가 남극 같은 극한의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을 연구하면 인류에게 이로운 새로운 물질을 찾아낼 수 있다”면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의류는 성장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을 경우 성장을 멈추고 빛·수분·온도 등 요건이 갖춰지면 다시 성장하는 독특한 성질을 지녔다”고 소개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